독서 기록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도 탄생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끊어지지 않고 시간을 흐르는 강과 같다. 모든 사람은 역사의 일부로서 거대한 강의 흐름 속에 녹아든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회 속에 참여하면서 역사의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데루모토가 이끄는 서군의 싸움이었다. 거의 모든 다이묘가 동군이나 서군에 붙어서 싸웠기에 이 전투로 누가 일본의 지배자가 되는지 결정되는 것이었다. 서군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배자로 추대하려고 했다. 동군이 이긴다면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몰아내고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었다 . <이에야스의 전국 통일>
이에야스가 일본을 평정한 이후, 보다 정교한 봉건제가 확립되었다. 천황 조정은 형식적인 존재일 뿐이었고, 막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 권력의 원천은 토지였다. 이에야스 이전에는 쇼군은 다이묘 중 세력이 강한 다이묘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고 그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츠는 다이묘를 자신 아래 복종시켰다. 또한 다이묘에도 차등을 두었는데,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씨의 친척, 후다이 다이묘는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 사람 혹은 그의 후손, 도지마 다이묘는 자진해서 복종해온 다이묘이다. 도지마 다이묘를 감시하고자 그의 영지 중간중간에 신판 다이묘 혹은 후다이 다이묘를 배치했다. 그리고 모든 다이묘는 1년을 번갈아가면서 에도에 거주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다이묘의 세력을 약화하고 반란 계획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에야스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해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무역상들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천주교의 교리가 막부 봉건제와는 모순되는 점이 많다는 점, 그리고 천주교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이에야스는 쇄국 정책으로 네덜란드의 상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들을 추방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이어진 쇄국 정책은 막부의 정치적 안정에는 공헌했지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세계적인 추세에 뒤처지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1853년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하였다. 일본에서는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존왕양이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대립하였다. 페리 제독의 위협에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가나가와 조약은 최혜국 대우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 막부는 통상을 지지하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존왕양이론을 주장하며 개항에 반대하였다.
그 후 영사재판권을 포함한 일미수호통상조약까지 체결되면서 일본과 미국 간의 관계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일본의 입장에서 메이지 유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약을 개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런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
메이지 원년인 1868년 정월 도바/후시미에서 구 막부군과 신 정부군이 대결하였다. 도쿠가와 측이 패배하면서 권력은 천황과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그 당시 막부와 조정의 대립에서 조정과 막부의 협력을 주장하는 중도파도 있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다.
1890년 10월 30일 교육칙어가 공표되었다.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국가관이 바탕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서쪽에서 동쪽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놓여 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동맹 관계였고, 러시아-프랑스 동맹, 영국-프랑스 동맹, 영국-일본 동맹, 그리고 세르비아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 사건은 동맹국의 연이은 참전으로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일본은 중국에서의 독일 영토를 얻을 목적으로 참전하였다.
독일의 예상과 달리 서부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와중에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기울었고 일본은 승전국이 되어서 중국의 산동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일본은 9개국(일본·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 조약의 견제로 산동성을 포기해야 했다.
독일은 베르사유 협약으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독일 정부는 화폐를 마구 찍어내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종전 후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 국제연맹 창설 등을 골자로 하는 ‘14개 조항’을 발표하게 된다.
<한일 합방>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1907년 한일 신협약, 1910년 한일 합방 조약으로 조선은 순차적으로 주권을 잃어 갔다.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파죽지세로 영국,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점령했지만 모스크바의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전쟁은 아시아-태평양까지 확대되었다. 전쟁 후반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소련) 연합군의 전쟁이었다.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 히틀러는 자결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목표로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점령하고 만주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추대해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나 일시적인 점령이었을 뿐, 점령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었더라도 일본의 국력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영토를 가진 국가는 제국주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즉 일본은 이미 불가능해진 환상을 뒤늦게 잡으려 하는 것이다.
미국이 오키나와에 이어 일본 본토까지 쳐들어오면서 일본의 패배는 확실해졌음에도 군부는 항복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폭발하고 나서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다. 1938년 중일 전쟁 도중에 제정된 국가총동원법 및 1940-1945년의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유럽 열강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자만감이 혼합된 결과 중 하나이다. 모든 자만심을 내려놓고 항복해야만 했을 때 일본 군부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일본이 강경하게 나오자 미국도 원자폭탄으로 대응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사용한다는 것이 어이없는 아이러니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극우 파시즘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있었던 반면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정신적 상징이 있었다. 일본 군부는 천황이라는 커튼을 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