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일지

<이야기 중국사 1>, 김희영

독서 일지

by 송한결

춘추전국시대에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한 사람들이 제각기 다양한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갔다. 선을 실천하려는 사람, 강자가 되려는 사람, 역사의 바깥에서 무위자연하는 노자(老子)같은 사람,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이다.

공자가 주군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공자의 도덕관이 모든 점에서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학 기술은 역사를 통해 꾸준히 발전해왔다. 사상과 철학도 역사가 쌓이며 풍부해졌다. 그러나 도덕은 매 순간 새롭게 실천해야 하기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 은, 주>

하나라는 중국 고대 최초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신화 속 나라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은나라 때의 일화가 하나라의 기록에서도 똑같이 적혀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라 최후의 왕이었던 걸(桀)은 말희라는 여인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를 일삼으며 풍습을 문란하게 하였다. 하나라는 은나라의 탕왕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은나라는 상나라라고도 하며,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로 생각된다. 은나라 또한 달기라는 여인에 의해 국사가 문란해지고 국력이 쇠약해져 주 무왕에게 정복되었다. 하나라가 정복된 경위와 은나라가 정복된 경위가 대체로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라가 가공의 나라라는 한 가지 근거이다(이 책에 의하면).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는 주 무왕이 무력으로 은나라를 정복한 것을 한탄하며 주나라에 살기를 거부하고 무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부차(혹은 합려), 월나라 구천을 춘추 시대의 다섯 패자, 곧 춘추오패라 하였다.

오자서에 얽힌 일화가 흥미로워 소개하려 한다. 오자서의 아버지는 오사, 형은 오상이다. 오사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建)을 보좌하는 태부였다. 또한 비무기(費無忌)라는 소부가 있었는데, 비무기는 평왕에게 건을 참소해 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그 후 평왕은 비무기의 의견을 들어, 오사를 인질 삼아 오사의 아들인 상, 원(오자서의 자)을 불렀다. 오상과 오자서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간다 하더라도 죽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자서는 오상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른 나라로 도망치자고 했지만, 오상은 아버지가 부르는데 가지 않고 복수에도 실패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며 오자서에게 복수를 맡기고 평왕에게 간다.

오자서와 건은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정나라 정공은 초나라를 두려워해 태자 건을 죽였고,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 송과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에서 당시 왕이었던 합려와 만나 오자서는 합려를 돕게 된다. 이후 오나라는 초나라를 정복하고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를 파헤쳐 삼백 번 채찍질을 했다고 한다.

기원전 475년은 주나라 원왕의 원년이자, 전성자가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고, 노예제가 무너지고 봉건제가 시작된 해이다.

기원전 453년 혹은 403년이 춘추 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인데, 기원전 453년에는 진나라가 위/한/조 세 나라로 분할되었다. 기원전 403년에는 주나라에게 위/한/조가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두 가지 의견이 있지만, 어쨌든 위/한/조 세 나라가 춘추 전국 시대를 나누는 경계인 것이다. 그 당시 주나라는 상징적 권위는 있었지만 약소국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제/초/연/조/한/위/진‘ 의 전국 칠웅이 세력을 다투였다. 이외에 주/노/송/중산 등 약소국 10여 국이 있었다. 주나라의 상징적 권위도 점차 쇠퇴해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는 제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백가쟁명>

위나라의 위왕은 기원전 357년에 즉위하였다. 위왕은 서문의 하나인 직문 근처에 저택을 짓고 인재를 모아 학문 토론의 장으로 삼았다. 위왕의 지원에 힘입어 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학문과 사상은 크게 발전했다.

<전국칠웅>

전국 칠웅의 하나인 진나라에서는 공손앙이 법치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엄격한 법을 제정하고 태자라 할지라도 법을 어길 수 없도록 하였다. 법과 제도가 단단하게 확립되자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다. 다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을 제정해 국민들은 자유를 침해당하는 일이 많았다.

전국칠웅 중에서도 진나라가 가장 강력했다. 당시 정세를 둘러싸고 합종설과 연횡설이 대립하였다. 합종설은 연/제/초/한/위/조가 동맹을 맺고 진나라와 맞서게 하려는 전략이고, 연횡설은 진나라가 6개국과 각각 화친을 맺고 6개국 서로가 대립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6개국의 입장을 통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합종설이나 연횡설이 완벽하게 실현된 적은 없었다.

<진나라의 통일>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이후 많은 제도를 개혁했다. 진시황은 법치주의를 믿었기 때문에 엄격한 법과 제도로 중앙집권적/법치주의적 국가를 만들려 했다. 우선 나라를 36군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을 두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했고,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엄격한 법을 제정해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였음에도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가혹한 법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다. 지주는 여전히 소작농을 착취하였을 뿐 아니라, 법대로 한다고 했음에도 황제 마음대로 진시황릉과 아방궁 공사에 국민들을 동원하였다. 이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진승/오광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실패하였지만, 그 후 항우와 유방이 주도해서 진나라를 무너뜨렸다.

진나라가 통일했으나 국민들을 부역에 동원해 진시황릉과 아방궁을 짓게 하자 국민들의 불만으로 곳곳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얼마 못가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독재 정권이 국민들을 마음대로 부린 탓에 봉기나 시위가 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일은 독재정권의 역사적 필연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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