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일지

<이야기 중국사 2>, 김희영

독서 일지

by 송한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현대정치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자주 하셨던 말이다. 20세기 정치사는 공인된(?) 독재자들의 역할이 절반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동유럽과 중남미의 많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의 반대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이라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람은 중국의 황제임에 틀림없다. 역사가 보여주듯,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후 깨끗한 권력이 3대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을 친족 중심의 정치 체제의 문제점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그 본질은 인간의 심리에 내재해 있다.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가 어렵고, 또 현명한 황제가 나오기 어려웠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세 가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더 큰 권력을 원하고, 기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누르려 하고, 권력을 수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싶어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는 그 수단이 전쟁이었고, 중국의 황제에게는 사치와 향락이 대표적인 목적이었다.

<석숭과 왕개>

석숭과 왕개는 세습 호족이었다. 엄청난 부자로 유명했던 두 사람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서로 부를 경쟁하기도 했는데, 왕개가 비단으로 20km에 이르는 장막을 만들자 석숭은 훨씬 비싼 비단으로 25km 길이의 장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둘 다 부자이기는 하였으나 왕개는 석숭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수나라>

수나라의 첫째 황제인 문제는 중앙집권화, 병농일치제, 지방행정의 간소화 등의 정책을 펴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뒤를 이어 서기 604년 즉위한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힘을 쏟다가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진다.

3차 전쟁에서는 수나라와 고구려가 둘 다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고난이 극심하였다. 고구려가 화해를 요청해 수나라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기 617년에 지방관리들의 반란이 일어나 수나라 황실의 권위는 추락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다. 이밀이 곡창 지대였던 낙구창을 거점 삼아 낙양을 공격하였다. 그 후 장안을 칠지 회락창을 확보할지 고민하다가 회락창을 공격하였는데, 그 사이 이연이 장안을 급습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당나라를 세웠다. 이연은 당 고조이고 그의 둘째 아들 세민은 태종이 되었다.

원래 당 고조의 태자는 첫째 아들인 건성이었다. 세민은 고조에게, 건성과 원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고조는 건성과 원길을 불렀다. 세민은 이것을 노렸는데, 황제의 부름에는 반드시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있는 곳에 들어가려면 현무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현무문의 수비대장 상하는 건성의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성과 원길은 안심하며 현무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세민은 이미 상하를 매수해서 건성과 원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건성과 원길은 현무문에서 살해되는데,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 태종이 잔인한 황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하들의 간언을 수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학자들과 관리들에게 자주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본인이 공부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를 창업함에 있어 짐은 군사를 이끌고 각지를 전전하며 반란의 무리들을 토벌하였소. 이 곡조는 바로 이런 내용을 담은 것이오. 무공에는 문덕(文德)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당나라 건국의 기초는 역시 이런 싸움(무공)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겠소. 지금은 비록 평화스러운 세상이지만 그 옛날 싸우던 일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재상 봉덕이(封德彛)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군마를 거느리시고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시며 세상을 평정한 무공이야말로 문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이라 생각되옵니다.”

당태종은 봉덕이의 말을 가로막다시피 나서며 말하였다.

“그것은 좀 어폐가 있는 말인 것 같소. 난을 평정하는 데는 무를,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문을 써야 할 것이오. 이것은 각각 그 시대의 형편에 따라 시의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백제, 고구려의 멸망>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당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는데, 김춘추의 외교가 성공해 현경 5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 토벌에 나서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 직후 고구려도 공격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안록산의 난>

천오 14년(서기 755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난다. 낙양이 함락되고 현종은 피난을 간다. 반란 후 당나라는 쇠퇴 일로를 걷는다. 907년 선무 절도사 주전충이 당의 마지막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송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를 오대십국 시대라 하는데, 당->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송나라로 이어진다.

<오대십국 시대>

주전충과 이극용은 서로 대립하던 관계였는데,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후당을 세운다. 석경당에 의해 후당 또한 정복되어 후진이 세워진다. 938년, 석경당은 거란 황제에게 연운 16주를 바쳤다.

후진은 거란(요나라)에게 패배하였고 유지원은 기회를 틈타 후한을 세웠다. 유지원의 차남 유승우가 측근 곽위를 죽이려 하자 곽위가 반란을 일으켜 후주를 세운다. 조광윤은 후주의 공제에게 양위 받아 송나라를 세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야기 중국사 1> , 신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