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일지
<아편 전쟁>
영국과 청나라는 17세기 후반부터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항상 영국이 많은 적자를 보고 대량의 은이 유출되는 형편이었다.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영국은 아편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청나라의 아편 중독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는 여러 차례 아편 무역을 금지하려 했지만 공공연하게 밀수가 행해지고 있었다. 청나라가 밀수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영국 선박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영국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아편 전쟁이라고 부른다.
영국 내에서도 금지하는 마약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훨씬 많은 국민들을 죽게 한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결국은 그저 침략과 약탈의 명분이었을 뿐이다. 아마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이 정도로 비도덕적인 명분은 없을 것이다.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의 국민들과 건물들을 황폐화시켰을 뿐 아니라 많은 문화유산들을 파괴하고 재산을 약탈해 갔다. 물론 아편 무역은 계속되었다.
청나라에서는 양무운동을 전개했지만 권력층의 부패와 보수적 성격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의화단 운동이 강력해지자 서태후는 의화단을 활용해 서양 및 일본과 싸우려 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구 세력이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의 조약을 강요하는 핑곗거리만 만들어 줄 뿐이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선통제이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만들어 민주적 공화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무창 봉기가 성공함으로써 중화민국을 세웠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세력이었던 원세개에게 패해 도쿄로 떠났다. 원세개는 정식 대총통이 되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임시약법을 수정했다.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중 원세개는 황제로 등극하지만, 강한 반발에 어쩔 수 없이 발언을 취소했다.
쑨원은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장제스가 입당해 쑨원 곁에서 활동했다. 쑨원이 사망한 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북벌 정책을 폈다. 당시에는 무한을 거점으로 하는 공산당, 남경을 거점으로 하는 국민당, 북경을 거점으로 하는 군부의 세 파벌이 있었다. 장제스가 북경에 입성하기 직전, 장작림 폭사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관동군이 일시적인 혼란을 노리고 일으킨 사건인데, 일본의 예상과 반대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장제스에게 합류하였다.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무한의 공산 정부도 붕괴하고 공산당은 남창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장제스가 공산당을 추격해 이기기 직전,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이 발생해 국민당은 남경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1933년 8월 장제스는 5차 포위 토벌전으로 서금을 포위하자 공산당은 12,000km를 행군해 소련에 도착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제 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회담을 가졌으나 결의문은 곧 파기되고 국공 내전이 발생한다. 미국도 국민당을 지원했고, 원래부터 국민당이 훨씬 군사적으로 우세했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정치적 지지가 떨어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으면서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계속해서 이긴다.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자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될 것이라고 보고 반공 정책을 수정한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만으로 가서 중국과 독립된 정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