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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31. 2022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힘

성교육 현장 속 이야기



"만약, 우리반에 성적으로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친구가 있다면,  여러분은 피해친구의 피해회복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그 폭력을 사소화하거나 무시하기 쉽다. 우리의 마음이 악해서라기보다 '성폭력'의 '력', 즉 '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힘들을 마주하고, 그 힘의 차이 속에서 살아간다. 무거운 물건을 잘 들거나 위험한 무기 등을 사용하는 물리적인 힘, 가정이나 친구관계 혹은 회사에서 발생하는 지위권력의 힘, 그리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명언처럼 인지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힘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왠일인지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사회적 지위나 권력, 인지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힘들은 어디가고 '물리적인 힘' 만 남는다.  그러한 까닭에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은 성폭력은 마치 성폭력이 아닌 것 처럼 착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격려나 응원이라는 이유로 신체적 접촉을 하거나, 친하다는 이유로 성적인 사생활을 캐묻고, 사랑이라는 이유로 혹은 '나는 원래 낮저밤이야' 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상대에게 성적행위를 밀어붙이는 행위들이 그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일상 속에 묻히고 만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진행할 때는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요?' 라는 포괄적인 질문보다는 '성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피해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성폭력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일상 속의 성폭력을 발견하고 또한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할 힘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욕심도 함께해서다.

 

실제 수업에서 위의 질문을 던졌을 때 심리상담을 권유한다, 위로해준다, 응원한다, 하루 한번 좋은 말을 건넨다, 평소처럼 같이 논다 등의 의견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 나의 눈에 띄는 의견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친구의 본명으로 부른다" 였다.


유년기의 나 역시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들에게 "조빠라(좆빨아)" 라고 불리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뜻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빠라라고 불릴때마다 그 친구들을 향한 분노감과 나에 대한 혐오감은 정비례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본명으로 부른다니.

렇게 쉽고 간단하고 명쾌하면서도 확실한 회복이 어디있을까!



성폭력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것이 특별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한다면 나조차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명으로 부른다' 같은 방법이라면 누구라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튼다.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는 것, 성폭력 예방은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 할 수 있다는 것.

그러한 희망을 함께 발견하는 성교육 현장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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