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상(幻想)을 그리고 싶다"
'미처 못 끝낸 이야기',한지에 색연필과 크레용, 1977년
화가 최욱경(1940~1985)에게는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무엇이 그녀를 천재라고 불리게 하는 것일까.
흔히 예술가에게 따라다니는 천재라는 용어는 자칫 사실을 왜곡시켜 오히려 그 예술가의 진면목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그 예술가의 예술적 재능과 성과보다는 한 사람의 파란 많은 삶을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그의 예술적 성과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가 최욱경에게 있어 호사가로부터 천재로 불리게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최욱경은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한창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4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 요절이라는 흔한 천재의 요건에 부합한다.
그리고 여자로서 젊은 나이에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미술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더하여 술과 담배를 즐긴 독신이었다는, 1970~80년대로서는 흔하지 않은 면모가 저널리즘과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욱경이란 화가는 이러한 비본질적인 내용을 능가하는 화가로서의 재능과 성과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기에 천재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최욱경은 출판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김기창과 박래현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워 이화여중과 서울예고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던 중인 196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브루클린 미술학교 등지에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추상표현주의의 화풍을 익힌다.
일찍이 국내에서 미술대학을 다니던 중인 1961년 한국미술협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타고난 재능을 드러내었다.
미국 유학 중인 1968년에는 뉴햄프셔 주의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에서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다 1971년에 귀국했다.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모노톤의 앵포르멜의 '차가운 추상'과 구상의 민중미술이 주류 미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최욱경은 추상표현주의의 '뜨거운 추상'에 몰두했다.
1972년에는 파리 비엔날레 공모전에서 3위로 수상하는 한편, 귀국 이듬해인 1972년에는 자신의 그림을 곁들인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 또 다른 재능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최욱경은 1973년의 개인전에서 우리의 단청과 민화의 다채로운 색채를 도입한 작품을 선보이는 등 전통적인 색채와 재료를 실험하던 중 두 번째로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사막과 꽃의 화가'로 불리는 미국의 여성 추상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아 그녀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연구, 1977년에는 위스콘신 주립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81년에는 다시 귀국,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다 1985년에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확실히 최욱경의 그림에서는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커다란 꽃그림도 유사하고 꽃뿐만 아니라 새, 물고기 등 자연의 사물에서 소재를 가져온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원래 밝고 강렬했던 색채감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채 감각을 보여주었고, 곡선으로 어우러지는 꽃과 자연의 사물들이 리듬감을 주면서 지극히 음악적이면서 시적인 화면을 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욱경의 그림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그림 '미처 못 끝낸 이야기'에서도 2차 미국 유학기에 정립한 그녀의 후기작의 특징인 부드러운 파스텔톤 색채로 한지라는 전통적인 재료에 유화 물감이 아닌 색연필과 크레용을 사용하여 유화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선묘가 주는 동적인 리듬감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화면 속의 형태들이 어우러지고 혼합되면서 지속되는 율동을 만들어 형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넘어선 추상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이처럼 음악과 시적 리듬 만이 구현된 그림에서 '미처 못 끝낸 이야기'라는 그림의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욱경이란 화가의 이른 죽음을 생각할 때, 그림이 주는 밝고 음악적인 울림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제목에서 느끼게 된다.
그녀는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녀의 그림은 우리에게 끝없는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