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초저녁부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펄프 픽션' DVD를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밤 10시경부터 몸이 나른한 것이 컨디션이 영 별로입니다. 오늘 하루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다 잠이나 푹 잘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2월의 첫날을 이렇게 보낼 수 없어 어제에 이어 음악을 한곡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연약해서 오랜 지구의 역사 속에서 생존하고 번창해온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내 몸 하나 제어하지 못할 때가 그렇습니다. 한 줌 크기도 되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온 세상이 곤혹을 치르고 있는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는 현실이라는 거미줄에 갇혀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는 거미줄은 바로 우리가 탄생시킨 문명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더 깊게는 그처럼 찬란하지만 완고한 문명을 설계한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영혼을 가두어 버린 거미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에덴동산에서 살다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후손인 우리가 생존을 위해 쌓아 올린 바벨탑이 오늘의 문명이요, 찬란한 문명을 낳은 의식의 기저에는 위험한 대자연에 맞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불안이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불안은 연약한 우리의 본질을 위장하는 갖가지 의식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는 나 자신의 강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나마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던 사람의 예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속 인물인 조르바에게서 찾아봅니다. 여기서 소설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이 소설을 좋아했던 대학 친구 L이 생각나는군요. 그 친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공부 하나만큼은 잘해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습니다. 독특한 성격의 친구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기행도 서슴지 않아 오히려 동급생에게 인기가 높았던 친구였습니다. 매사에 활달하고 자신만만하던 그 친구는 한 여학생을 사랑하다 그 여학생으로 인해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사랑했던 여학생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대학으로 갈 생각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산에서 나무를 잘라 나르는 산판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등록금마저 날리고 결국 다시 대학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의 파란 많은 시절에 가까이 지내면서 친구의 범상치 않은 행동이 사실은 현실의 간난을 이기고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자기 최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했던 것도 힘겨운 삶의 조건을 벗어나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소설과 함께 앤서니 퀸이 조르바 역을 맡은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도 생각이 나네요.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만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이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언제 또 한 번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테오도라키스는 클래식에서부터 대중음악까지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작곡가입니다. 영화 속에서 조르바와 버질이 함께 추는 시르타키 춤의 선율이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조르바의 춤'이란 곡으로 워낙 유명하고 귀에 익은 선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