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백기완 선생께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금처럼 온 국민이 이념적으로 극명하게 양분된 상태에서 선생에 대하여 글에서 언급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합니다만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의 죽음은 사회적으로는 진보운동 1세대가 마감되었다는 의미가 있겠고, 개인적으로는 신념에 따라 살아간 고단했던 일생을 끝내고 비로소 안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고단했던 일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숙연한 마음에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촛불 시위에서 연설하던 선생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만 선생의 부음에 선생께서 평생 지켜왔던 진보운동의 현재를 아프게 돌아보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보수는 자유를 그 가치로 하고, 진보는 평등을 가치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치 기준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가치가 조화를 이룰 때에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물론 조화는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생성과 해소라는 과정을 통해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조화를 이루어갈 대상으로 생각하고 타협하기보다는 제압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진보의 가치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라는 명백한 현실에 머물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완전한 평등의 실현이 가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기회와 부의 균등을 이루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와 윤리 의식이 존재할 수 있을 때 건전한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조국 사태를 경험하면서 저는 진보의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쟁점은 합법, 혹은 불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를 신념으로 하는 사람의 윤리에 대한 문제입니다만 진보를 가치를 기치로 한 두 정당이 스스로 진보의 가치를 부정하는 모습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은 야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여당, 즉 진보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결과에 대하여 환호를 보냈지만 제 마음은 전혀 편치가 않았습니다. 정당 정치에 있어 이처럼 상호 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자초하게 됩니다. 합법적으로 정당에 의한 독재가 가능케 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총선의 결과 앞에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여권 내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이제 그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들 운동권 출신들은 그들이 학생운동의 주역이었을 때 정권을 상대로 민주화를 쟁취한 경험을 가진 세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헤게모니에 의해 분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포기하고(학생운동의 가장 큰 무기는 순수성에 있습니다) 정치세력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경험이 정치 현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전투적인 생각이 결코 긍정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제가 가졌던 걱정이 기우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합니다. 저는 지금의 진보 정권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현 정권의 불안한 행보에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가 역사의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라는 저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나치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쓴 글을 모아 훗날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얇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어떤 내용보다 삶이 끝나는 순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담벼락에 일렬로 세워진 채 나치의 총구를 떠난 탄환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상황에서 마르크 블로크는 바로 옆에서 목숨을 빼앗길 소년의 앞을 막아서서 대신 탄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 프랑스 만세!"를 외친 후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가 보여준 그 행동이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역사학자로서 역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책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하겠습니다.
밥 딜런(Bob Dylan)의 유명한 노래 'Browin' In The Wind(바람 만이 아는 대답)'의 노랫말처럼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 불확실하지만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의 올바른 진행을 믿으며 당당하고 겸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브런치 북을 꾸미고 있는 지금,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대패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겸허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인식이 결여된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