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가는 봄날, 서러운 밤의 풍경을

- Marisa Sannia의 'La Playa'

by 밤과 꿈


언제나 밤이 오고, 잎들의 지문이

선명해지는 밤길을 걸어간다.

지난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열매의 맛이


아려온다, 꽃은 찢긴 살처럼 빛난다.


새벽 두 시에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머리 위에 얹혀진 찬 달.



박형준 시인의 시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인'의 전문입니다. 시를 읽고 있는 지금, 마음이 아파옵니다.

봄빛도 환하게 절정에서 머물 때 도리어 봄은 서러움의 이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봄이 바야흐로 그 절정을 향해 다급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때입니다.

이 시는 봄꽃의 환한 사랑이 절정을 지나가는 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랑은 언제나 아픔과 상처를 동반하게 되는지에 대한 심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밤의 습윤한 대기와 같이 칙칙한 후회가 메우게 되는지를......

마침 이 시가 노래하는 풍경도 밤이네요. 그 풍경에는 찢어지고 아린 사랑의 상처도 보입니다.

하필이면 나무의 찢긴 상처를 보듬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과 나무의 아픔을 섞어 스스로가 풍경이 됩니다.

왠지 풍경을 바라보는 남자도 짜지 않은 빨래처럼 후줄근한 자신의 아픔을 껴안고 함께 풍경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번 봄에는 마음 가득 서러움에 물들 것만 같습니다.


문득 'La Playa'라고 이 시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원래는 '바닷가'라는 뜻의 노래입니다만 엉뚱하게도 우리에게는 '안개 낀 밤의 데이트'라는 그럴듯한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바뀌어 통용되는 것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La Playa'라는 노래는 1964년에 작곡된 덴마크의 대중음악입니다만 샹송 가수 마리 라포레(Marie Laforet)가 프랑스어로 불러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매춘부의 삶을 그린 그리스 영화 '안개 낀 밤의 데이트'가 1965년에 일본에서 개봉되면서 생뚱맞게도 이 음악의 클로드 치아리(Claude Ciari)의 기타 연주 버전이 OST로 삽입된 것입니다. 더불어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될 때에도 일본의 프린트가 사용, 클로드 치아리의 연주가 국내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963년 최초 개봉 당시에는 이 노래와 영화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입니다.

워낙 국내에서 클로드 치아리의 연주가 인기가 있었지만 이탈리아의 칸초네 가수 마리사 산니아(Marisa Sannia)의 허스키한 음색이 돋보이는 노래가 좋습니다.

사실 클로드 치아리의 연주는 이 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안 어울립니다.

노래의 가사는 상관없이 제목과 분위기로 들을 노래입니다. 어차피 이탈리아 말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일본 king records 발매(1978년 제작)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9-n_UXb9pq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