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어설퍼서 아름다운 이름

by 밤과 꿈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그것은 단순하게 신체의 노화 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심리적인 퇴행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현업에서 은퇴하여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난다는 불안감, 이에 따라 점점 잃어가는 자신감, 그리고 가족에게서조차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소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장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노년을 향해 다급하게 흘러갈수록 이에 비례해서 자신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 일도 잦아지게 된다. 그것이 지나간 시간 속에 갇혀 버린 그 무엇의 결핍, 그러니까 지금은 되살릴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한 습관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공이라는 생존 경쟁에서 터득한 삶의 태도를 능가하는 가치를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하는 소중한 것이며, 무모하리만큼 열정을 지닌 감정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한마디로 '순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기 이전, 흔히 말하기로는 철들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순수의 시간에 머물고 있었다. 개인적인 편차는 있겠지만 우리가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는 성장기에는 순수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아서 그 가치를 드러내지를 못한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이제 막 사회와 접촉을 시작하는 이십 대의 나이에 이르러 순수는 비로소 빛을 발하며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나 성장기에 원석에 머물러 있었던 순수가 청년기에 이르러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대가가 적지 않다. 그동안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함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의 행동과 생각은 어설프고 성급해서 젊음은 무방비로 상처 받기 일쑤다.

이처럼 청년기인 이십 대에 이르러 세상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상처는 당사자에게 상당히 치명적일 수가 있다. 그것은 생의 한 순간에 왔다가 지나가는 성장통과는 달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젊은 날의 어떤 경험으로 해서 인생의 궤도가 바뀌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시기가 역사의 격동기와 겹친다면 한 개인의 삶이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게 전개될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개인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적 현실이 삶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민주화 과정을 아우르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민초들이 겪는 고난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대학생으로서 이십 대를 보냈던 1980년대 초반은 유신 정권이 피를 쏟으며 종말을 고한 후 찾아왔던 민주화의 씨앗이 신군부의 군홧발에 의해 짓밟힌 좌절의 시기였다.

신군부의 정권 야욕에 희생된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들이 보낸 질곡의 시간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19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좌절과 패배주의의 기운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가뜩이나 불안했던 내 이십 대에 공허를 이식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젊음을, 그리고 그 시대를 아파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힘겹게나마 공허를 견딜 수 있었다.

불안했던 젊음은 지나간 시간과 함께 추억으로 남겨진 삶의 잔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나에게서 떠나간 순수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젊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 시절에 천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나 자신에게 이십 대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최근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십 대 초반의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지 아팠다는 것이다. 젊음, 그리고 한 시대로 인한 자상이 나름 깊었기에 후유증도 컸다. 그래서 줄곧 젊은 날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과거와 단절된 현재와 미래가 있을 수 없기에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계속된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의 과거를 마음에서 놓지 않았다.

어설프고 미숙했던, 그래서 아팠던 그 시절의 순수가 아름답게 생각되는 요즘,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시간들을 외롭게 사랑했었던 것 같다. 1980년대를 향한 나의 외사랑... 돌이켜보면 끔찍하게 외로웠던 시간이었지만 먹장구름의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햇살처럼 미소와 함께 기억되는 순간도 있었기에 아픔도 견딜 수 있었다.

지나간 그 시절의 아픔도, 외로움도 더 이상은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제, 그리운 마음으로 지난날 나의 외사랑을 기록하면서 미처 찾지 못한 젊은 날의 의미를 찾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