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의 2월, 대학 진학을 위해 난생처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옷가지와 같은 내 사물과 함께 된장, 고추장 등을 무겁게 들고 화곡동에 있었던 큰 누나의 신혼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좁은 아파트의 신접살림에 동생을 맞아들인 누나의 입장에서는 작은 방을 내 거처로 내어준다는 것이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경상도 촌뜨기의 설레는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만 내 심정은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와 같은 설렘 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기 3일 전 아버지께서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술을 즐겨 마셨던 아버지의 간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집을 나서 먼길을 떠나야 하는 나에게 상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암이란 극복할 방도가 전혀 없어 일단 병에 걸리면 고통을 견디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불치의 병이었다. 그러니 내 대학 생활은 심란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 년 후,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깊어진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명동에 있었던 노덕삼 방사선 의원에 입원하셨다. 마침 입원 날이 아버지의 생신이었기에 마지막 생신이 될 수도 있는 그날에 서울에 살던 온 가족이 모여 병실에서 조촐하게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약속했던 시간에 늦어 아버지께서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겨울방학 이후 두어 달 동안 더 약해져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병이 깊어 보였다. 소리 없이 흐르는 내 낙루(落淚)에 아버지께서도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이미 복수가 차올라 희망 없이 낙향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고향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자청해서 병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려가시는 모습을 보지 않고 이른 아침에 중간고사를 핑계로 병실을 나섰다. 그때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병원 정문에 서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시험공부는커녕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마음의 번민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픔과 외로움이 마음 깊숙이에 사무쳐서 끝 간 데 없는 심연 속에 홀로 머물고 싶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이미 복수가 차 오르던 상태였기에 아버지에게 남은 기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은 스스로 앞당긴 것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 6월 초, 아버지께서는 주말에 문병을 위해 고향을 찾았던 작은 형님으로부터 발병 후 처음으로 맥주를 한잔 받으시면서 "막내를 빨리 내려보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형님께서 떠난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곧장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틀 후 야간열차로 고향에 내려간 나는 간발의 차이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이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끝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끊었던 술을 청해 마신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나 간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어머니를 위해서나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아버지에게 나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나 보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작은 형 밑으로 내가 사실상 가정을 이루지 않고 혼자 남은 자식이었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 날 아프게 생각했던 만큼 아버지는 나에게 아픈 이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공직에 있으면서 따로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로 재산을 잃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을 텐데 자식들이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키우셨다. 부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 애쓰면서도 고독했을 아버지, 그러면서도 그 책임을 다하신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런 아버지께서 다섯 명의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정년퇴직, 비로소 편안하게 지낼 때인데 환갑을 일 년 앞두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내가 1980년대 초를 되돌아보면서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먼저 떠올리는 까닭은 그만큼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예상과 다가온 현실이 나를 심적으로 불안에 빠지도록 한 큰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집안에서 큰 산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큰 산을 일찍 잃었고, 이후 집안에서 큰일이 있을 때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던지는 아쉬움과 혼돈을 많이 겪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라는 아픈 이름을 애써 외면해 왔다. 이에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함께 떠오르는 아픔이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 더하여 나 자신의 삶에 있어 1980년대가 가지는 의미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이제야말로 아버지라는 이름에 남겨진 아픔을 지워나가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