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아직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낭만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낭만이라는 말속에는 한 시대가 담아낼 수 있는 갖가지 감정과 애환의 진한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1960년대 초에 태어나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한국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전후의 빈곤과 혼란스러운 정치적 격동의 시간 속에 있었기에 부모 세대와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과 함께 했던 것처럼 성장기의 사회상은 우리에게 낭만과 정치적 변혁의 경험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 변혁이 완결되지 못하고 제5공화국으로 이어졌기에 우리의 대학 생활은 이에 무관할 수 없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자 하는 고뇌와 개인적인 아픔이 점철된 것이었다. 그리고 많이 아팠기에 오히려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렇게 내가 아팠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그 아픔을 힘들게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전에 성장기에 형성되었을 나의 내면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고, 동일한 경험도 사람에 따라 반응하는 방법과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차이가 있어 이를 언급하는 것이 글의 내용에 공감을 구하기에 유용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내 사주(四柱)를 풀어온 적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사주 풀이는 "성격이 곧고 능력은 많으나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평생이 외롭다"라는 것이었다. 글쎄, 내가 능력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생이 외롭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이름까지도 강해서 말밥굽 정(鉦) 자에 공 훈(勳) 자를 썼다. 영웅에게나 어울릴 이름이다. 리더는 외로운 법. 영웅은 되지 못하면서 외로운 기운은 고스란히 물려받을 이름인 것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여름에 부모님께서 해수욕장으로 날 데리고 갈려고 했다. 수영복도 없는데 말이다. 1960년대에 수영복을 가진 경우보다는 없는 꼬맹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것도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한적한 계곡도 아니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해수욕장에서 아무리 꼬맹이라고 팬티만 입은 나를 노출시키다니, 어른들은 왜 어린아이에게도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를 못할까. 결국 그날에는 해수욕장을 가지 못했다. 내 손으로 유리창을 깨뜨려 손목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내 자해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부모님들은 야단도 치지 않았다. 지금도 내 오른쪽 손목에는 그날의 흉터가 남아있다. 그러나 손목에 남겨진 상처보다도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 마음의 상처였다.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공기 중으로 감염되는 피부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부병이 직접 접촉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감염되지는 않을 터, 아마도 다른 감염병이었을 텐데 피부병과 같은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키지 않을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난 뒤 그 공기를 호흡으로 다시 빨아들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쉬는 시간에 같은 반 친구 녀석이 장난으로 나에게 흑판 지우개를 던져 분필 가루가 옷에 묻었다. 화가 난 나는 그 친구를 경찰서로 끌고 가겠다고 학교 문을 나섰다. 그 친구는 장난으로 생각했는지 순순히 나를 따라나섰다가 경찰서 정문 앞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자신이 잘못했다고 비로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친구의 사과를 받고 학교로 돌아오니 옆반의 담임 선생님께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뭐, 경찰서... 허 참"이라면서 들어가란다. 전후 사정을 우리 반 아이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출산으로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그때는 대체 교사도 없어 매일 자습만 했다) 상황이었는데 반장인 내가 교실을 비웠으니 아마 학급이 난장판이라 옆반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왔을 것이다.
이들 일화가 보여주듯 어릴 때부터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고, 남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것 또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자의식이 강해 나와 타인의 경계가 분명한 성격이었다.
이와 같은 자의식은 때로는 오히려 비수가 되어 자신을 겨누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판단할 때 옳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과는 쉽게 타협하지 못한다. 영락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성격이다.
외롭다 보니 성장하면서 말수도 적어지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때로는 자의식이 죄책감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래서 사유에 오류를 깨닫고 마음을 허물게 되면 오래 마음 없이 살다 다시 마음을 쌓아가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거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처럼 강한 자의식은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파괴적인 본능이 되기도 한다. 어떤 감정에 빠지면 그 감정으로부터 쉽사리 벗어나지를 못한다.
나는 그렇게 자의식이 강한 성격으로 살아왔다. 그래도 내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 동안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 시간들이 모두 인내심의 연단(鍊鍛)이었다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