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일 년 후배인 첫사랑은 원래 가까운 후배가 좋아했었던 여자 동아리 회원이었다.
언젠가 후배가 나에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며 어떻게 할지를 물어왔었다. 그때 나는 후배에게 "그럼, 네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지 뭘 그렇게 망설이냐"라고 조언을 했었다. 이후 나로서는 남의 연애사에는 크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후배도 두 사람 사이에 대한 말이 더 이상 없었기에 나에게 있어 그녀는 후배로 인해 기억되는 여자 후배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동아리에 들어온 이성 후배에게 딴마음을 품을 개재(介在)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2학년 봄 축제를 앞둔 어느 음악 감상일이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그녀가 "형, 축제에 파트너가 되어달라면 설마 가실 수 없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는 여학생이 남자 선배를 부를 때 '형'이라고 불렀다.) 글쎄, 후배 때문에 보다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그녀는 참한 외모와 성격의 여학생으로 가볍게 그 자리에서 "그래"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후배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기에 무어라고 답하기도 어려웠다. 설혹 두 사람의 관계가 큰 의미가 없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후배가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쉽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도 그녀도 축제 마지막 날에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녀는 예쁘게 원피스까지 입고 왔건만.
그리고 2교시에 강의가 있어 서둘러 지하철로 학교에 가던 어느 날이었다. 급한 걸음에 속이 좋지 않아 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역사는 밀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로 한산했다. 국철 구간으로 이 역을 이용하는 대학생 이외에는 그 시간에는 이용객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역사에 유일하게 플랫폼에서 개찰구로 나가는 계단을 한 여학생이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그녀였다. 우리는 각자의 강의실로 가기 전까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전동차를 타고 왔다가 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등 등, 이런 일들로 해서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이 이끌리고, 그녀가 점차 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계속 모른 척하기도 어려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내 마음에 네가 들어왔다고.
당시 그녀는 매주 토요일에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위한 교리를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무턱대고 명동성당으로 갔다. 물론 그전에 그녀를 좋아했던 후배에게도 내 의사를 밝혔다.
내 마음을 전해 들은 그녀도 싫은 기색은 아닌 듯한데 하는 말은 참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라나, 이런 면에서 여자의 자기 방어 본능은 가히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월요일 문리대 휴게실에서 우연히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 화장을 옅게 한 것 같기에 "너, 화장한 것 같다"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늘 미팅을 할 예정이란다. 그래서 미팅 잘하라고 말해 주었더니만 "멋있는 남자 만날 거예요"라고 말한다. 한참 미팅에 열 올릴 수도 있을 때인지라 이왕이면 좋은 시간 가지라고 해준 말인데 생뚱맞았다.
이후에 우리 사이는 뜻하지 않게 밀당으로 점철된 것이 되고 말았다. 2학년 여름 방학을 끝내고 그녀는 동아리 내 같은 과 여학생 김ㅇ희의 이름을 거론, "나쁜 계집애"라고 말하면서 "잘 될 수도 있었는데 모든 것이 끝났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이란다.
그런데 말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듯해서 내심 짜증스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저울질할 생각인가 하는 불쾌한 심사가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밀당을 원한다면 따라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그녀가 잘 보이는 좌석에 자리 잡고 신경 쓰이는 밀당을 시작했다. 내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이런 일을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불필요한 신경전이지만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그녀와의 밀당을 지속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밀당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녀는 방학을 한 번씩 지날 때마다 점점 방어적으로 나를 대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그녀가 나 때문인지 동아리를 멀리했기에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방학 중에는 아예 얼굴 마주칠 걱정도 없이 속이 편했을 텐데...
무엇이 문제인지를 혼자서 복기해 보았다. 먼저 그녀가 내가 꿈속에서 나타날까 봐 두려울 만큼 나를 싫어한다면, 그렇다면 계속 악몽에 시달릴 필요 없이 우리 사이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될 일. "이제 형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형을 미워하게 되기 이전에 형도 감정을 정리했으면 해"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그랬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골백 번을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예측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가 그녀에게 압박이 되었거나,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싶은 것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작용했으리라.
3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를 찾으니 새언니(제주도 서귀포 출신인 그녀는 오빠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가 잠시 기다리란다. 그런데 공중전화 통화시간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전화를 받기 싫으면 새언니를 통해 통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전하든지, 하다 못해 깊이 잠이 들어 깨울 수 없다는 말이라도 전달받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녀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었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친구에게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내가 정한 장소에 그녀가 나올 리가 만무했지만 내 마음이 그냥 그녀를 보고 싶었다.
만나자고 전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말고 문리대 앞으로 올라갔다. 이미 강의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그렇게 문리대 앞에서 죽치고 있는데 멀찍이 한 여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였는데 고개를 숙이고 내 시선을 피하면서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라고 말을 얼버무리면서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얼굴도 상한 듯 그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그녀를 붙들지도 못했다. 나도 참 마음이 약했다. 오후에 학교 앞에서 또 한 번 그녀와 얼굴을 마주쳐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사람이 왜 그렇게 일방적이냐면서 교재와 노트를 든 채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쳐 밀어내고 그냥 도망을 가버렸다. 졸지에 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일방적인 것일까. 강의 시간에 일부러 늦으면서까지 처절하게 나를 피할 이유가 또 뭔가. 내가 호환마마도 아닌데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나를 밀어내고 있는지...
만약 그녀가 첫사랑이 아니었다면 6개월이고 1년이고 아무 액션도 없이 나 몰라라하고 그녀를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녀가 백기 투항하기 이전까지는 그녀를 아예 잊은 듯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첫사랑이라 내 마음이 어설프고 모질지 못했다.
글쎄... 내가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미안함도 있었지만 굳이 나를 그렇게 대해야만 했는지... 내 마음이 많이 아쉽고 답답했다.
당시에는 여자의 자존심을 고려해서 아무 내색도 안 했지만 그녀는 왜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솔직하지 못했을까. 그냥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없었을까. 그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 만큼 나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어서 문제를 풀 수 없었다면 그녀라도 지혜로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긴 우리는 너무 어렸다. 우리가 처음 알았을 때 그녀가 스무 살, 내가 스무한 살이었으니 그녀가 나로 인한 부담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내 첫사랑이 제대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짝사랑도 아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미처 몰랐다. 내게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의 마음이 가시처럼 아프게 마음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