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그녀가 "형을 한번 보기는 해야 할 것 같다"라면서 먼저 만나자고 했다. 이럴 경우 썩 예감이 좋지 않다.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는 그녀는 진하게 화장까지 했다. 기초화장이 피부에 잘 안 먹어 화장품이 얼굴에서 떴다. 어울리지 않게 화장은 왜 했을까. 여자의 화장이란 타인에 대한 보여주기의 심리가 감추어져 있다는데 그녀의 화장이 뜻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언가 마음을 다잡고 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 입장에서 본심을 감추고 싶은 것일까. 할 말과 자신의 본심이 다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찰나의 짧은 순간 그녀의 마음을 빠르게 점검했다.
"제가 부족해서인지 모르지만... 형은 너무 철학적이라... 지금으로서는 형이 이해가 안 돼요."
"?..."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했다. 철학적이라... 그만큼 그녀에게는 내가 어려운 사람이어서 현 상황에서는 둘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어쨌든 내 존재가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알았다. 내가 그렇게 불편하다면 네가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하자"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심란한 마음에 동아리방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동급생 친구가 와서는 "좀 전에 지나가다 ㅇ영이를 봤는데, 방긋 웃으면서 인사를 하길래 화장을 하니 예쁘다고 말해 줬지"란다. 내 마음에 염장을 지른다. 좀 전까지 심각해 있다가 방글거리면서 돌아다니다니... 내가 너무 쉽게 원하는 답을 줬나 하고 생각을 하니 심사가 편치 않았다.
글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안기는 존재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고, 그만큼 마음의 상심이 컸다.
남자로서 한 여자에 대한 배려가 그토록 부족했는지... 명동성당에서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만 해도 나도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마음이 기대로 부풀었던 그날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몇 주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마음의 허한 구멍을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메우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순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진작에 내 마음에 그녀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다른 생각을 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핑계 같지만 당시는 내 마음이 박토(薄土)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배려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만큼 나 또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 나는 한국 사람 치고는 꽤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에 결과가 발생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결과는 이성적 사고에 따르는 의지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처럼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그녀가 좀 더 이성적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나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것이나 불만이 있다면 대화를 통해 해소할 일이었다. 그녀와 같은 식으로 사람을 회피한다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일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실체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생각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에 대하여 내가 가진 확신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녀의 행동이 그녀의 마음에 대한 나의 견고한 확신을 허물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힘들었던 것만큼 나도 힘들었었다. 우리 두 사람이 힘들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각자 확신과 자존심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불만을 드러내고 표한 적도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생각이 있을 터인데 이해도 없이 내 생각을 강요한다면 내 생각에 스스로 객관성을 보장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그녀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내 태도가 숨이 막힐 만큼 자신을 옥죄는 것이었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다. 또한 그로 인해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올 틈을 주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그날 우리의 만남에 대하여 시간의 여유를 가지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당장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둘 사이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나는 견딜 수 없는 공허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애정도 당사자 간의 긴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내 경우 긴장의 해소는 나를 무기력한 상태로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문제로 지쳐 학교에 있을 의미를 잃고 다음 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 점은 앞으로 다시 언급하겠지만 더불어 그녀에 대한 내 사랑도 접어야 할 때가 왔던 것이다. 끝으로 그녀에게 작별 인사는 하고 갔었어야 했지만 중앙도서관에서 찾은 그녀는 말없이 열람실 책상에 얼굴을 파묻기에 심란한 마음을 뒤집어서 뭐할까 싶어 작별도 제대로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와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그녀에게 계속 썼다 찢어 버렸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그녀에 대한 마음의 총량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편지를 쓰는데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에 편지의 첫머리를 "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쓰고, "부디 행복해라"는 말로 끝맺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작별 인사를 대신해 그녀에게 부쳤다. 그 편지가 그녀에게 제대로 당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나는 내 마음에서 첫사랑의 장을 넘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참 이기적이었다. 내가 자의적으로 마음에서 그녀를 지우겠다고 하면서 그녀에 대해서는 고려나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홀가분함이 아니라 죄책감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나는 정신적 자학과 돌파구 없는 난행(難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나의 행동 또한 편지 쓰기를 통해 내 마음에 남은 그녀의 크기를 가늠했듯이 자해와 같은 난행을 통해 그녀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복학 후 그녀의 친구로부터 그녀의 결혼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그녀의 친구도 내 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면서 그녀와 내가 아무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지 시키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불필요한 과거를 말끔하게 지우고 싶은 것일까. 당사자도 아니면서 친구까지 나서서... 참 눈물겨운 우정이다. 뭐 그 친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년 동안 썸만 탔으니까. 그런데 지나간 시간 속에 갇혀, 지금은 유효하지 않는 일들을 부정한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친구와 내 친구가 성당에서 결혼하는 날, 사진 촬영을 위해 본당 건물 앞에 모여 있을 때였다. 한 후배가 귀속말로 "제 ㅇ영이가 맞죠?"라고 말하길래 쳐다보니 바로 옆에 그녀가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았지만 첫눈에는 몰라볼 뻔했다. 많이 말라서.
그래서 "결혼했다면서?"라고 말하니 "예"라고 굳은 얼굴로 말한다. 마음으로는 늦었지만 축하를 해주고 싶은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 본심은 축하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지인들 단체 촬영을 하는데 그녀가 사진을 찍지 않고 가려는 걸 신부가 불러 세운다. 아마도 나와는 같이 사진 찍히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은 듯. 결혼까지 했으면 과거의 감정은 잊어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그녀를 보고 온 날 저녁에 이상하게 내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다음날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마음 넓은 여자 후배 김ㅇ조를 카페로 불러 놓고서는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흥분해서 털어놓게 되었다. 그 후배로서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느라고 곤혹스러웠겠지만 어느 누구든 붙들고 첫사랑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내 첫사랑이 비로소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순간이었다.
오랜 난행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던 것이 일순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긋난 첫사랑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른 공간에 있음을 실제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아내와의 결혼도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