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억에서 건져 올린 고통의 언어

-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를 읽고

by 밤과 꿈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야만이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Adorno, Teodor)의 말은 전후 독일 지식인들의 참담한 자의식이 배어 있는 것으로 말은 이제 글을 쉽사리, 그리고 감상적인 미문을 쓸 수 없게 된 문학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 문장은 전영애 교수가 옮긴 '파울 첼란 시선집, 죽음의 푸가' 속 작가 소개 글의 서두를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전후 독일 지식인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자의식을 적절하게 나타낸 말인 동시에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피해자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가 가진 문학적 의미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파울 첼란의 부모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었고, 파울 첼란은 구사일생으로 가스실 행을 모면했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파울 첼란에게는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파울 첼란의 초기 시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회한에 찬 기억이 아프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파울 첼란의 아픔은 날것의 기록이 아니라 "깊고 오랜 내면화의 침전을 거친 기억, 정화된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1952년에 발표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초기 시들은 초현실주의적인 은유로 가득 차있는데 대표적인 시가 이 시선집의 제목이기도 한 '죽음의 푸가'이다. 파울 첼란의 이름을 알린 시이기도 하지만 워낙 난해한 시인지라 '화인(火印)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곗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퉁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두 번 나는 네 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파울 첼란의 시에는 이 시와 같은 화인(火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쓰라린 기억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역자인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의 시에 대하여 "세상에는 이렇게 어려운, 이렇게 자신을 온통 쏟아 쓴 글도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시는 "그 언젠가 그 누구에게 가 닿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으로 밀봉하여 띄운 것 같은 글, 침묵 너머에서 쓰인 글"의 이미지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또한 "첼란의 글에 담긴, 고도의 문학성에 감싸여 수렴된 고통을 접한 것은 내게 문학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파울 첼란의 시는 고통의 시간을 함축하는 침묵 너머로 떠오르는 창백한, 서정적인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건 시간의 눈
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
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

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
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1955년에 출판된 시집 '문턱에서 문턱으로'에 수록된 '시간의 눈'이라는 시이다.

앞서 인용한 시 '화인(火印)'에서와 같이(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이 시에서도 '눈'은 중요한 제재(題材)로 등장하고 있다. 사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눈'은 자주 등장하는 제재로, 이것을 침묵으로부터 고통과 죄의식을 드러내는 내면의 의식으로 이해한다면 첼란의 고통스러운 내면의 언어를 이해하기에 용이할 것이다.

사실 파울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썼고, 그의 시는 전후 독일 문학의 가장 혁신적인 성과였지만 첼란은 독일에서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인 루마니아의 체르노비츠가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였기에 독일어가 통용되는 곳인지라 독일어는 그의 모국어라고 할 만큼 구사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파울 첼란은 여러 지역에서 불문학과 영문학도 전공,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이것은 유대인 예술가들에게서 흔하게 표출되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 의식을 첼란도 겪고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유대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주변인 의식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디에서도 국외자로서 살아가면서 과거의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파울 첼란에게 있어 삶 자체가 고통일 수 있었을 것이다. 1970년 파울 첼란은 파리의 센 강에서 투신, 스스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

파울 첼란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는데, 짙어가는 내면의 고통만큼 문장이 해체되고 있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파울 첼란이 생을 마감하기 두 해 전에 쓴 시 '더듬더듬 따라 말할 세상'에서 이미 첼란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나, 그의 손님
이었으리, 이름 하나였으리,
상처가 높이 핥아 올라간
장벽에서 식은땀으로 흘러내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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