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이 땅의 남쪽 광주에서의 가슴 아픈 살육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도 살육의 주범이 살아 있어 한(恨)이 응어리져 도시를 휘감고 있는 곳, 광주의 참상을 당시에는 온 국민들이 바로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광주는 외로운 도시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한동안 광주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금기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그것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명백한 표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군대는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목숨을 앗아간 비열하고도 참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이 벌어졌지만 어느 누구도 진실을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던 시절에 나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신입생으로서 한 학기를 정신없이 보내고 난 후 나에게 잘못된 사회 현실에 눈 뜰 기회가 왔다. 음악 감상 동아리에 최ㅇ윤이라는 선배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 선배는 원래 흥사단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1981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다 이내 풀려나,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 동아리로 들어왔던 것 같다. 그 선배가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우리 역사에 대한 서적 30 여권을 소개하면서 여름방학 때 읽어볼 것을 권유, 10 여권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후배에게 사회과학과 우리 역사에 눈뜨게 하기 위한 선의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생물학과에 다니던, 일 년 선배인 최ㅇ숙 선배를 알게 되어 이학계열 내 동급생으로 이루어진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결성,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에 운동권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학습 커리큘럼이 있었다. 먼저 현실 인식의 수정을 위한 서적을 읽고 토론을 하게 되는데, 이에 사용된 책으로는 송건호가 편저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이 먼저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이 과정이 끝나게 되면 최종식 교수의 '서양 경제사론'을 읽음으로 본격적인 경제사 공부가 시작된다. 사실 최종식 교수의 이 책은 경제학과의 교본으로 사용될 만큼 뛰어난 저서로 사상적 편향이 없는 책이다. 이후 일본어 서적의 독본이 가능하도록 일본어 문법 학습을 거치게 되고, 이어서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과 '세계 경제사론'과 같이 보다 진보적 관점에서 쓰인 책들을 탐독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으로 일 학년을 다 보내고 그 뒤에는 각자의 취향과 목적에 따라 우리 역사나 정치학 방면으로 공부를 지속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비평에 관심이 있어 비평론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2학년부터 문리대 학술부 소속으로 학술 세미나 주제에 맞춰 책을 읽어 나갔었다.
이 과정들을 외부에서는 의식화 과정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동안 편향된 사회 인식을 주입해온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새롭게 알게 되는 우리 현대사와 경제 구조에 대한 인식은 신선한 것이었다. 다만 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을 실천하는 방안과 균형 감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와 실천적 행동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적지 않은 고민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를 역사와 사회라는 문제에 천착하게 한 것은 단순한 지식욕이 아니었음은 물론이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짧았던 1980년의 봄을 지나 반복하지 않아도 좋았을 억압의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순수했던 젊음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야말로 어떤 역사적 당위와 논리보다 앞서는 현실 참여의 이유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초의 대학 분위기로서는 우리 현실에 대한 의식과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한 외로움과 번민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좌절된 1980년의 봄은 학생운동의 역량과 위상을 크게 위축시켰고, 학교 내부에서 상주하는 공권력의 감시를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각 대학에서의 학생운동(SM)을 노동운동(LM)으로 연결, 지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학생운동은 노동운동 실천을 위한 전 단계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는 197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첨예하게 노출되었던 노동 현장에서의 투쟁이 여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운동권 학생들은 3학년까지는 후배들의 학습을 돕고, 4학년이 되어서는 후배들과의 연관 등 신변을 정리한 후 2인이 한 조가 되어 교내에서 D를 감행(데모 주동을 이렇게 표현했다)하게 된다. 대규모 시위 자체가 불가능했던 그때, 시위는 교내에 상주하던 정보과 형사와 학생처 직원들에 의해 이내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모자 학생들은 집시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영어의 몸으로 있다 풀려나서 노동 현장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모두에게 무겁게 열려 있는 미래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내가 대학을 들어갈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자의 3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예당초 대학 진학을 포기했거나 경쟁에서 밀린 70% 정도의 적지 않은 숫자가 산업 역군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구로공단을 비롯한 전국의 공업 단지에서 저임금에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간 것이 내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듯이 그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닌 것이다. 그 저변에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평등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사회적 불평등이 가중된 자본주의 시대에 공산주의가 나타났지만 정치, 경제 체제로서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성공을 장담하기에는 그 미래가 결코 밝은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매번 상존하는 불평등을 증거하고 있지만 어떤 면으로도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반대편의 사람들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시각일런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도 젊음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1980년대 초 내가 가진 생각이 이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가지게 된 신념을 연단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