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문리대 학생회 산하 학술부라는 공식적인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조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임인 언더(under)와, 우리와 같이 총학이나 단학의 조직으로 편입하거나 공식적인 학술 동아리로 등록하여 활동하는 오픈(open)이 있었다. 기독학생회처럼 종교 동아리나 탈춤반처럼 취미 동아리로 등록되어 있으면서 학생운동의 색깔이 짙은 동아리도 일종의 오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픈이 되어 활동하는 이유는 공식적인 학생 조직이라는 보호막을 이용, 공개적인 모임을 시의에 맞게 활용하자는 것에 있었다.
우리 문리대 학술부는 5월의 봄 축제에 학교 내 AV센터에서 '제3세계와 종속이론'이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열기로 하고, 학교 내 학생운동권은 이 행사를 시위로 연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날 3명의 발제자 중 한 사람으로 나서 발표한 글은 대학신문에 실렸지만 사실 짧은 준비 기간이라 선배의 도움이 컸던 세미나였다.
축제가 끝나고 우리는 학술 동아리 예맥에서 활동하던 사학과의 조ㅇ순 등 새롭게 인원을 보강하여 내년도 세미나 주제를 '소외론 연구'로 정하고, 바로 소외론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국내에 소개된 소외론에 관한 서적을 거의 탐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외론의 공부는 이후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확립하는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소외라고 하는 개념은 근대 산업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소외라는 개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라면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이 유명하지만 그의 초기 저작의 근간이 되는 소외론에서 보이는 마르크스라는 대학자의 깊은 통찰력에 대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소외란 인간이 그 본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한 산업사회는 소외가 만연한 병든 사회로서 소외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노동의 상업화'를 들 수 있다. 본래 사람은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산물을 온전히 소유함으로써 노동을 가치를 확인하는데,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는 자신의 노동이 상품화되어 노동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없어 소외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노동의 분업화'를 소외의 원인으로 언급한다. 자본주의의 근대 산업사회에서 생산의 효율을 감안한 분업은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이 생산한 산물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소외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결론적으로 사회의 소외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의 사유를 공동 소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 이후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의 사상적 근간이 소외론 연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공산 사회의 아이디어가 드러난 결론보다는 상업화와 분업화에서 소외의 개념을 이끌어낸 마르크스의 학자로서의 명철함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이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네오 막시스트 에리히 프롬이 건전한 사회에서 소외론을 확장, 건전한 사회를 정의하기를 정신적으로는 사랑의 회복과 사회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실현을 들고 있는데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가 학술 서적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왠지 뜬구름을 잡는 듯 명쾌함은 덜했다.
소외론을 공부하면서 더불어 후배들의 독서를 지도했으니 이때가 가장 열정적으로 역사와 사회과학에 몰두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최고의 기쁨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를 책 속에서 발견할 때이다. 이때 이런 경험을 가질 수 있었으니 책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이 나 혼자 만의 독단이나 망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쁨이 컸다.
문리대 학술부장으로 있었던 3학년은 '소외론 연구'라는 주제의 학술 세미나를 마친 후 학술부와 같은 오픈이 아닌, 문리대의 나와 다른 단과대학의 대표로 구성된 새로운 언더 모임을 구상하면서 내 나름의 신념을 벼리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내 사고의 틀을 구체화할수록 일반적인 운동권의 논리와는 다른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