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前)

by 밤과 꿈

학생운동의 모든 조직은 점조직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선배 이외에는 그 존재를 알기 힘들었다.

물론 워낙 좁은 바닥이라 같은 학번이라면 서로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 또한 같은 모임의 구성원이 아니라면 서로가 말을 섞을 일조차 없었다.

훗날 발족하는 전대협과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학생운동 연합기구의 구성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시절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권 내에서 학습을 하다 대열에서 벗어나는 인원이 생기게 된다. 지적 호기심으로 사회과학을 접하다 운동권의 생리에 맞지 않아 대열을 이탈하게 되는 경우이다. 운동권에서는 이들을 운동권의 하부 구조를 구성할 인원으로 보았다. 적극적인 운동 세력은 아니지만 언제나 운동을 지지하며 유사시에 동참할 인원으로 보고 그 양성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사실 이들이야 지적 호기심으로 사회 현실에 접근했으니 운동권으로부터 소원한 관계가 된다한들 심적 갈등은 크지 않겠지만, 학생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직 내에서 알게 모르게 겪는 심적 갈등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3학년 때 5월의 봄 축제 기간에 학술 세미나를 마친 후 새로운 언더 모임을 구상하고 있을 때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중앙도서관 1층 로비에서 시위가 계획되었던 날이었다. 시위가 시작되면 같은 과의 주ㅇ곤과 함께, 열람실에서 시위 현장으로 나왔다 우왕좌왕하는 인원들이 다시 열람실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다되도록 시위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사복형사들이 정경대학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경찰에서는 그날의 시위 현장을 정경대학 쪽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결국 그날의 시위는 불발로 끝났다. 그리고 시위를 계획했던 측에서는 시위 불발의 원인을 역추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탈춤반과 고전음악 감상반에서 시위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날 경제학과에서 시위와 관련, 성급한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 탈춤반과 고전음악 감상반에 속한 경제학과 우리 학번이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고전음악 감상반에는 내가 있었다. 사실 우리 동아리의 경제학과 친구 이ㅇ훈에게 내가 생각하는 언더 모임의 동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시위가 계획되어 있다는 사실을 흘렸는데 그것이 그만 사달이 난 것이었다.

이런 일은 운동권 내의 내 입지를 불안케 하는 것으로 입지의 회복을 위해서도 언더 모임의 결성을 서둘러야 했다. 결국 나와 경제학과의 이ㅇ훈, 그리고 선배로부터 소개받은 의대생인 ㅇ명의 세 사람으로 새로운 모임을 만들게 되었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조직의 생리에 서서히 염증이 생기기도 했었다.

시위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 즉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류가스가 난무하는 시위의 현장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쉽게 구경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규모 시위라면 학내 문제로 한 번,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종로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경험했을 뿐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학내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시위는 2~3인이 한 조가 되어 주도하게 되는데 사전에 시위 사실을 전달받은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전단을 뿌리고 이내 학교 내에 파견 나온 형사들에 의해 주동자들이 체포, 진압되고 마는 모양새였다.

4학년으로 이루어진 시위 주동자들은 시위의 결행 이전에 후배와의 관계 등 신변을 정리하여 학생운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조치를 강구하게 되는 것이었다.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면서 최ㅇ숙 선배가 방학 중에 학교가 아닌 시내에서 보자고 미리 알려왔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전날에 마신 술이 과해서 깨어났을 때 이미 약속 시간을 한참 지나 있었다. 학교가 아닌 시내에서 날 보자고 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개학 후에 만나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는 그 선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학기 개학과 함께 선배는 시위를 주도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방학 중에 우리를 만나 신변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작은 키의 강단 있는 여장부 최ㅇ숙 선배의 마지막을 볼 수 없었다.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한 나 혼자만 선배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그날 모두와 작별 인사를 미리 나누었던 것인지......

뒤늦게 내 불찰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날 선배와의 약속을 지켰어야 했다. 사실 우리도 학교 내에서의 역할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함께 모여 운동의 방향을 교내에서 노동 야학과 같이 학교 바깥으로 전환할 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날의 불찰로 4학년이 되면서 내가 학교에서 고립이 되었다. 나로서도 아쉽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선배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든 선배는 마지막까지 후배에게 선배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자신이 학교에서 펼치는 마지막 활동을 직계 후배들에게 알리지 않은 선배가 고맙기도 했었다. 눈앞에서 선배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대로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후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 선배의 배려가 고마웠다.

다른 학교에 다녔던 고향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가 1학년 때 선배와의 약속 장소에 나갔다 멋모르고 휩쓸려 당시 민정당사를 점거하게 됐었단다. 그리고 생긴 게 워낙 험하게 생긴 후배에게 경찰이 "넌 주동자임에 틀림없어"라고 했단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을 1학년 후배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선배가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시절이 좋아져서 지난날의 학생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많아졌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정확히는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려진 1983년 12월까지는 일반 학생들의 외면과 몰이해로 학생운동은 외로운 길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 조직의 냉정한 생리 속에서 또 다른 번민을 안고 가야 하는 고뇌에 찬 길이기도 했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