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학교를 떠나다

by 밤과 꿈

1983년 12월, 정부에 의해 '학원 자율화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에 따라 1984년의 대학 분위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비운동권의 학생들이 볼 때에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었겠지만 운동권의 입장에서는 운동의 방향과 투쟁의 양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고 유보된 민주화를 이루기까지는 아직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방향도 다시 설정되어야겠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학원 자율화라는 상황 변화에 따라 학내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이에 따라 '학원 자율화 추진위원회'(이하 '학자 추위'라고 표기한다)가 결성되어 학교 당국을 상대로 학원 자율화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를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모이기조차 힘들어 학술 세미나 등을 이용, 외로운 몸부림과 같은 시위를 해야 했던 지난 시간에 비해 그나마 집회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로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부를 상대로 하는 운동권의 강력한 대정부 투쟁은 1986년의 5.3 인천사태(화염병이 처음 등장한 시위였다)를 거쳐 1년 뒤인 1987년의 6.29 선언으로 절정을 맞이했던 것이었다.

물론 학생운동이라고 반드시 정부를 상대로 하는 투쟁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 때문에 학생운동이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으로 편향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학생운동이 문화적인 면이나 학술적인 면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학자 추위'의 활동은 나름 유의미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학자 추위'의 활동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자 추위'는 같은 학번의 사학과 학생들인 권ㅇ국, 조ㅇ순 등 2인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중 조ㅇ순은 나와 함께 문리대 학술부 활동을 같이 한 바가 있었지만, '학자 추위'가 운동권의 총의에 따라 결성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활동에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1984년이 되면서 내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선 최ㅇ숙 선배는 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같은 과의 이ㅇ봉, 수학과의 김ㅇ숙, 화학과의 김ㅇ주 등의 모습이 학교에서 사라졌다. 나름 자신의 길을 찾아 학교를 떠났겠지만, 같은 과의 이ㅇ봉이 노동 현장을 찾아갔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친구들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이후에 다시 만났을 때에도 저간의 사정을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 시간들이 아픔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과의 주ㅇ곤은 억울하게 제적을 당한 경우였다. 최ㅇ숙 선배가 시위를 주도하다 검거된 후 자신의 활동 한 가지를 진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진술한 것이 기독학생회라는 동아리였고, 이 바람에 그 동아리의 리더 격인 물리학과의 주ㅇ곤과 사학과의 김ㅇ철이 생뚱맞게 제적을 당한 것이었다. 3학년 2학기에 이미 제적이 되어 주ㅇ곤은 구제 방안을 찾아 상주 형사를 찾아다니는 등 분주했고, 김ㅇ철은 곧바로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학교에서 홀로 외롭게 시위를 시도하다 붙들려 옥살이를 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모두 떠나간 학교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지낸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첫사랑마저 이때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나의 대학생활은 첫사랑에게나 최ㅇ숙 선배를 비롯한 학생운동권 전체에게나 죄책감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너무 지쳤었고, 대학 생활이 더 이상 어떤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학교를 그만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때까지 나는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았었다. 한 번은 1학년 1학기에 아직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생물 과제물도 제출하지 못해 학점을 받지 못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2학년 1학기였다. 앞서 '아픈 이름으로 남은 아버지' 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버지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을 때였다. 중간고사 기간에 서울의 전문 병원에 입원하셨다 생존 가능성이 없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고, 기말고사 직전에 서둘러 돌아가셨다. 야간열차를 이용, 내려간 고향에서 뵈온 아버지의 모습은 무어라고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에야 병원마다 편안한 임종을 위한 통증 완화 치료라는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만 당시 아버지는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의 극심한 고통을 밤새 견디고 탈진한 상태였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깨문 혀로 인해 입 속은 피가 딱지가 되어 범벅을 이루었고, 아버지께서는 생명의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모든 걱정 내려놓으시고 편하게 가세요"라고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환갑을 일 년 앞둔 안타까운 나이였다.

대학 진학을 3일 앞두고 아버지의 발병 사실을 안 이후로 나는 줄곧 나에게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처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순간부터 장례의 절차가 모두 끝나는 순간까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슬픔 이전에 엄연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슬픔은 현실의 뒤를 이어 찾아오는 법이다. 어쩌자고 장례를 마치고 난 뒤 비로소 슬픔은 밀물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지. 한동안 슬픔의 늪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사실 아버지께서 서울에서 입원을 했을 때부터 나는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터. 그런 상실감은 사람을 한없이 무기력한 나락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1984년, 4학년의 1학기에 나는 학교를 떠날 마음으로 수강 과목의 출석과 시험을 거부(?)했다. 물론 썩 폼나는 방법은 아니지만 그 외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어차피 졸업 후 취직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인생 설계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나에게는 절망적이었기에 나에게 잠재된 파괴적 본능을 되살려 스스로를 방기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학교를 떠나게 된 계기에 난관에 봉착한 첫사랑의 문제도 있었음을 숨기지 않겠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신념이라고 하는 것도 거듭된 합리화의 과정을 거친 가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이라는 것을 흩어진 사유를 언어로 재구성하는 체계라고 할 때,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쓴이의 생각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만, 이 글의 성격이 자서전과 같아 주관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신념의 출구가 막혔다는 것은 개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유로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견뎌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그러나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타인에게 가지는 최선의 집중이다. 내가 첫사랑의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그 순간 그녀에게 집중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깨어진다는 것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고, 이런 상실감으로 인해 자신을 무기력한 상태로 방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학교를 떠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사랑의 상실 때문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첫사랑이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면 굳이 학교를 떠나는 결정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가 평행선을 달려야 했던 시간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은 그렇게 내가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면, 그래서 현실을 견딜 버팀목이 필요했다면 그때 사랑을 내려놓아서는 안되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속으로 탓했었지만 정작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 바보 같았다.

이처럼 다른 선택이 있었지만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모든 것을 나의 오류로 돌렸다. 앞에서 비슷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오류가 생겼을 때 스스로를 허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해체의 고뇌 속에서 새로운 응전(應戰)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야말로 통으로 자신을 허물어 버릴 때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