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우리들

by 밤과 꿈

1987년 6월 29일의 역사적인 6. 29 선언으로 인하여 광주 민주화운동에 뒤이은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얼어붙었던 이 땅의 민주화는 서서히 해동하고 있었다. 더불어 제5공화국 치하에서 중도에 대학을 떠나야 했던 모든 학생들에 대하여 이유를 불문한 복교 조치가 단행되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옛 동료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같은 학번에서 네 명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1984년에 '학자 추위'를 이끌었던 권 0국, 조 0순은 이미 졸업을 했고, (단식투쟁으로 출석 일수가 모자랐겠지만 학교의 입장에서는 빨리 졸업해 나가 주길 원했을 것이다.) 우리 과의 이ㅇ봉, 사학과의 김ㅇ철이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김ㅇ철은 집시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노동 현장에 취업, 의식화 학습을 이끌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지만 이 두 사람은 학교 복귀보다는 노동 현장에 남기로 한 것 같았다.


중앙도서관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서 어깨를 툭 두드린다. 수학과의 김ㅇ순이었다. 사복 경찰의 성추행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한때 쫓기던 몸이었는데 반가웠다.

그리고 치과 대학의 후배 이ㅇ준의 모습이 특히 반가웠다. 그 후배는 원래 고전음악 감상반의 후배였는데 내가 학생운동권으로 이끌었던 인연이 있었다. 지난 1984년, '학자 추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민주주의 만장을 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었다. 본인이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념이 있었겠지만, 그를 운동권으로 이끈 선배로서 잘 성장한 후배를 보는 흐뭇함과 함께 후배에 대한 홀어머니의 기대를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배는 지금 치과 의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다행한 일이다.

거의 4년 만에 보는 화학과의 김ㅇ주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을 나누자마자 대뜸 나에게 칸트주의자란다. 내가 관념론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생각이 많아 실행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운동권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지만 무모한 행동에 앞서 사고는 진중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었다. 이렇게 말하지만 인식과 행동의 우선 순위는 나에게는 오래 풀지 못한 난제였다.

어쨌든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친구가 답답해서 그냥 커피나 마시자고 했다. 대학 1학년 때 디스코 바지가 잘 어울리는 예쁘장한 첫인상의 여학생이었던 친구가 왜 이렇게 날 선 모습으로 변했는지...

그 친구의 모습에서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겪었을 아픈 시간들이 방어벽을 만들게 했겠지만 우리끼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그 친구가 같은 한 팀으로 활동하던 사학과 친구와 훗날 결혼을 했으니 다행이다.


다시 온 대학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캠퍼스의 곳곳에서 운동권의 구호가 난무하고 있었다. 은밀했던 우리 때의 모습에 비해 자유로운 모습이 생경한 것이었다. 그리고 난무하는 구호도 왠지 공허하게만 들렸다. 1970년대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 민족의 미래를 고민했던 선배 세대의 진지함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듯했다.

애당초 제5공화국이 1984년에 학원 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던 것은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대학을 옥죄었던 환경을 완화함으로써 운동권의 활동을 회유하고 순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학생운동은 이 틈을 타고 보다 조직화되고 시위도 과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1986년의 5.3 인천사태에서 처음 화염병이 등장한 이후, 대학의 시위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벌이는 전투(?)는 일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위의 과격화와 더불어 학생운동은 NL, PD 등으로 분화, 헤게모니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운동이 순수한 민주화 투쟁의 범주를 넘어 정치 집단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6.29 선언 이후에는 보다 강력한 대학생 조직인 전대협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는 정부로부터 6.29 선언을 이끌어낸 이후 그 승리를 발판으로 학생운동의 정치세력화를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생운동의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했다. 학생운동은 순수함을 생명으로 한다. 그리고 순수함이 결여된 학생운동은 대중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다. 민중이라는 뜨겁고 순수한 대상으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학생운동의 정치 세력화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다수가 제도권 정치에 투신, 정치가로 변신했지만 정작 그들의 터전이었던 학생운동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었다. 학교 내 곳곳에서 난무하는 고민 없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렸던 이유였다.

1980년대 초 고뇌를 가득 안은 채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 모두는 1980년대 후반에 맞이한 현실 앞에 일종의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 초 우리는 무지 아팠지만 그 아픔에 대한 위로가 우리와 함께 하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거듭하면서 까마아득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불안한 여정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6.29 선언이라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아무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것. 이것은 우리의 불안한 여정이 지향하던 목적지를 상실한 마음, 즉 무기력한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1970년대 말 유신 정권에 맞서 싸웠던 선배 세대와 1980년대 말 또다시 민주화를 이끌어 냈던 세대 사이에 있었던 '끼인 세대'였다. 우리는 신군부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역사 전환의 성숙을 기다리며 학생운동의 방향을 암중모색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야만 했었다.

우리가 가진 피해 의식의 이유이겠지만 광주의 아픔으로 시작된 1980년대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상처인 만큼 패배주의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