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이 붐비는 환승역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선교 활동을 하는 기독교 교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이 전도지를 건네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는 것이다. 하도 많이 듣는 말이라 불신자에게 그 말이 얼마만큼 신선하게 들릴지가 의문이다.
언젠가 기독교 TV 채널에서 잘 알려진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 중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좋으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던 적이 있었다.
노방 전도자의 말이나 유명 목사님의 말씀이나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 16)
이 성서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고, 천국으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 이외에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의 경우 믿음을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 믿음이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 13~14)
이처럼 믿음은 생명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예수가 갔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은 바로 십자가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 24)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또한 우리는 고난의 길을 지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구원은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임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 즉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오로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내려놓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고난의 가운데에 있다면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만일 위의 노방 전도자나 목사님의 경우와 같이 고난의 의미가 빠진 구원을 불신자에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저렴한 '신앙 팔이'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교의학 개요'에서 한 "기독교적 믿음은 결단이다. 그 결단 안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앎과 관련하여 책임을 질 자유를 갖는다. 그 책임은 그 신뢰와 앎을 교회의 언어 안에서, 그러나 또한 세상적 견해들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 상응하는 실천과 행동방식들 안에서 공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는 발언과 같이 믿음은 결단이며 고백이어야 한다.
칼 바르트는 또 말한다.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상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행동이다"라고.
믿음을 가지고 믿는 우리가 공공성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 안에서 공적 행동이 되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면 그 자체가 불신앙이라고 칼 바르트는 말한다.
이렇듯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해도 좋을 만큼 기독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