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는 배후가 없다

by 밤과 꿈


오래된 영어 참고서처럼

너덜너덜한 사랑법으로는

세상은커녕 여심(女心)조차

제대로 독해하지 못했다


아팠던 첫사랑은 물론

냉소(冷笑)라고 믿었던

짧은 인연들까지도

기어이 벽을 쌓고

거리를 두는 본성이었음에


모든 것이 변명이고 싶은

마음에 드리운 그늘이겠지만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여러분!

.

.

.

자신을 포장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변명이라고 하는 한 마디,

그제나 이제나

내 삶에는 배후가 없다


-------------------------------


NOTE


오랜 시간을 묻어두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 글을 쓰기 위함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아픈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다.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과 관련한 기억이야 어떤 의문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첫사랑에 대해서는 글을 쓴 이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체한 듯 마음에 걸려 있었다.

묻어버린 기억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작심하고 끄집어낸 아픔이기에 의문을 남겨둘 수도 없는 일이다.


2학년 2학기의 도서관에서의 밀당과 겨울을 지나 3학년이 되어 첫사랑과 카페에서 만났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날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은 오직 하나였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그녀는 낙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글쎄, 나도 이성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에 말이나 행동이 서툴 수밖에 없었는데 또 한 번의 기회도 없이 일 년을 줄기차게 나를 밀어낸 이유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첫사랑 이후 아내와 결혼하기까지 나는 여러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나도 첫사랑의 경험으로 학습이 되었는지 여자를 사귀는데 실패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매번 사귐을 길게 가져갈 수가 없었다. 여자가 너무 가깝게 다가오면 아예 내가 접근을 차단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미처 몰랐던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여자가 그 경계를 간섭할 경우에도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당시의 내 태도를 첫사랑의 아픔으로 가지게 된 여자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전에 비로소 깨달은 것은 그것이 내 본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순간 첫사랑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그녀가 느끼기에는 나에게서 벽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내 모습에서 변화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자신은 벽을 넘어 그녀에게로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나한테로 다가오기를 강요한 셈이었다. 이미 그녀의 백기 투항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사람이 일방적이냐"는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내가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으면서 글 속에서 그녀를 향해 "나를 그렇게 대해야 했느냐"라고 원망하고, 그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서 또 한 가지 깨닫는 것은 내 아픔의 상당 부분이 내 잘못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모르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의문이 풀렸기에 아픔의 상당 부분을 해소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냐고 비난한다면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너는 얼마나 이타적인 사람이냐고. 이성 간의 사랑에 있어서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 내가 솔직한 것이 아닐까.


첫사랑이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한 것이 그녀의 자존심 때문이라면 내가 그녀로 하여금 거리를 느끼게 한 것은 내 전인격에 의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내 태도는 거의 변화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에게 가지는 미안함도 내 태도 때문이 아니라, 내 완악한 태도로 인해 그녀가 겪었을 힘든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다. 물론 나로 인한 아픔이 아닌, 그녀에 대한 모자란 마음으로 인한 아픔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내 아픔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 자리를 부끄러움이 채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아픔이 덜하기에 부끄러움을 안고 지난 시간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르겠다. 내년에는 낭만과 사랑에 대한 글들을 생각하고 있기에 아픔이 되었든지 부끄러움이 되었든지 간에 지난 시간을 일 년 동안 더 붙들고 있어야 될 지도.

이렇게 후기가 길어질 만큼 내 마음이 복잡해, 모호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시를 남기게 된다. 내 감정을 앞세워 부질없이 정서를 남발하고 싶지도 않고, 달리 표현할 재능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