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자 시인의 시집 '연인들'을 읽고
아득한 봄날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 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빈 공책
- 한 추억을 위한 소묘
누가 펼쳐놓았나.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이 빈 공책.
그 위에 깊은 눈이 내려 침묵조차,
침묵이 걸어간 발자국조차 지워져버린
이 태초의 빈 공책을.
아니 그것은 내가 지워버린 공책이다.
나는 내가 써왔던 텍스트를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 위에다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다만 지워버렸고,
지워버렸다고 말할 뿐이다.
지워져버린 공책 위에 쌓인 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고, 그리고 안다.
이제 그 위로 소리 없이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그리고 그 공책은 영원히 닫혀질 것임을.
절판되었던 시집을 다시 펴본다.
절단되었던 다리가 새로 생겨나오는 것 같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달려왔던 시간,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헤매었던 시간,
그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는 이 시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가히 참, 아름답다.
2022년 1월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