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 고통이 점철된 시간들

- 최승자 시인의 시집 '연인들'을 읽고

by 밤과 꿈

최승자 시인의 시집 '연인들'이 지난 15일에 복간되었다. 이 시집의 초판이 1999년 1월 30일 세상에 나와 같은 해 3월 2일에 2쇄를 찍고 절판되었으니 20여 년만에 재출간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시집 '연인들'은 1993년 시집 '내 무덤 푸르고'가 출간된 지 5년 후에 출간되었고, 이후 11년이라는 긴 침묵 끝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이 2010년에 출간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시집 '연인들'을 출간하면서 시집 '내 무덤 푸르고' 이후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의 5년이라는 시간에 대하여 "모든 것들, 나 자신, 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 세계에 너무 지쳤다고 이제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서 한 여행을 시작하여 그 여행을 마치고서 이제 비로소 한 입구,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시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씌어진 시들"로 이 시집을 출간한다고 말한다.

시인이 말하는 '여행'은 무엇일까. 그리고 여행의 끝자리에서 발견한 출발점에서 쓴 시들은 어떤 것일까. 내가 뒤늦게 이 시집을 읽게 된 것도 시인의 내면 변화가 궁금해서였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여러 가지 상징 체계들, 말하자면 음양오행론, 서양 점성술,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타로 카드 등을 거치면서 거기서 얻은 생각들을 내 생각들로 바꾸어 나를 바꿔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이 시집 속의 시라고 말한다.

이를 다시 언급하기를, "자신을 둘러싼 세계,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상황과 조건이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들이 나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시"라는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체험을 겪으면서 시인은 자아의 분열을 경험하고, 2010년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출간하기까지 11년이라는 시간을 시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시인의 정신병력은 지속되어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에 수록된 시들은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썼던 시들이었고, 1년 뒤인 2011년에 출간된 시집 '물 위에 씌어진' 속의 시들은 아예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쓴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시인이 쓴 이후의 시들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이 시집의 시들에서는 시의 문법이 해체될 뿐만 아니라 시인의 생각이, 그리고 영혼마저 해체되어가는 듯해 안타깝다.

그 시들 중에는 시인 스스로도 "그 시들 하나하나에서 5년 동안 나 자신이 걸었던 짧거나 긴, 그리고 돌고 도는 여행들 중에서 어떤 때에 씌었던가를 아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듯 시인이 아니면 해독할 수 없는 내용의 시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40 편의 시 중에서 초반 5 편은 해체 이전의 시들이라 그중 한 편과 그나마 이해가 용이한 시 한 편을 예로 실어 본다.

아득한 봄날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 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빈 공책
- 한 추억을 위한 소묘


누가 펼쳐놓았나.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이 빈 공책.
그 위에 깊은 눈이 내려 침묵조차,
침묵이 걸어간 발자국조차 지워져버린
이 태초의 빈 공책을.
아니 그것은 내가 지워버린 공책이다.
나는 내가 써왔던 텍스트를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 위에다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다만 지워버렸고,
지워버렸다고 말할 뿐이다.
지워져버린 공책 위에 쌓인 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고, 그리고 안다.
이제 그 위로 소리 없이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그리고 그 공책은 영원히 닫혀질 것임을.


이 시집에서 나는 시보다는 시인의 힘들었던 시간을 읽는다.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선보이는 이 시집은 시인의 차지였던 아픔의 흔적이라 안타까움이 있다. 이 시들을 다시 대면하는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 개정판 시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절판되었던 시집을 다시 펴본다.
절단되었던 다리가 새로 생겨나오는 것 같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달려왔던 시간,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헤매었던 시간,
그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는 이 시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가히 참, 아름답다.

2022년 1월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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