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과 꿈 Mar 04. 2022

르네상스 음악, 천상의 노래

- 새롭게 읽는 서양 음악사(6)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배경


 르네상스(Renaissance)재생 혹은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로 15~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이라고 사전에서는 먼저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를 번역하여 '문예 부흥'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중등 과정의 학교에서 줄곧 배워 왔다. 말하다면 중세 시대라는 인문 정신의 암흑기 너머 그리스의 찬란했던 문학과 예술을 동경하고 그 영화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운동이 르네상스이고, 그러한 문화 경향이 주도했던 시기를 일컬어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 왔던 주입식 교육의 일례를 잘 보여주는 설명이다.


 르네상스와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가 발흥할 수 있었던 배경과 시대 양식으로서의 르네상스가 가진 근본정신, 그리고 르네상스에 대한 잘못 알려진 오류와 쟁점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12세기 말에 도시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시민 계급이 등장, 도시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게 된다. 이른바 상업 자본주의의 맹아가 중세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 형성된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 최초의 지역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이탈리아 지역이었으며, 이들 도시가 상업으로 얻은 경제적인 부는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만큼의 문화적 역량을 축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안목의 변화와 투자 의지를 불러왔고, 정확히는 15세기 초인 1420년 경에 르네상스라고 하는 시대 양식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 전경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이해


 여기서 한 가지 문화사적 쟁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를 중세의 '단절'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르네상스가 중세와 본질적으로 연속성이라는 속성으로 연결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각과 인식이었다는 생각, 즉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 시대에 대한 단절의 결과였다는 개념은 18세기 고전주의자들이  형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인본사상에서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을 도출, 르네상스 시대와 중세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시각을 촉진시킨 것은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근대성의 획득이 계몽주의의 대두, 그리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18세기의 현상이라고 할 때, 이에 대비되는 중세의 범위는 훨씬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싹텄을 때 유럽의 북부는 한동안 중세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초기의 르네상스는 지역 양식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호한 지역적, 민족적 경계는 시대 구분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후대인들에 의해 특징된 르네상스의 이미지가 실제 르네상스의 실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르네상스 시대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반종교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물론 르네상스인들에게 기독교는 중세인들에게 기독교가 모든 현상과 사고의 귀착이었던 것에 반해 덜 종교적이기는 했지만 이 시대에도 신앙심은 여전했다. 다만 중세 기독교의 교권적인 체계와 이의 바탕이 된 엄격한 스콜라 철학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강압적인 권위를 대신해 고대 그리스의 문화의 균형 잡힌 이상에 대한 가치에 눈을 돌린 것이 르네상스 문화였다. 르네상스의 인본적 경향은 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인본에의 지향은 르네상스의 특질로 개인주의와 자유사상을 떠오르게 하지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시각으로 르네상스를 바라본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르네상스를 예찬한 후대인들의 시각과 같이 르네상스를 중세와 결별한 새로운 시대, 즉 르네상스를 중세의 단절로 이해했던 것이 기존의 역사적 시각이었다면, 근대의 형성과 르네상스의 지역적, 민족적 편차 등을 이유로 르네상스를 중세와의 단절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시대도 중세 시대에 포괄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르네상스 예술의 일반적인 특징


 어쨌든 중세 시대의 기독교가 교황을 정점으로 전 유럽이 단일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면, 이탈리아 남부라는 지역적, 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탄생한 르네상스 문화는 단일화되고 통제적인 기존 문화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고 부드러운 특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경향은 르네상스 건축과 회화 예술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르네상스 건축에는 고딕 건축의 첨탑으로 표현되는 수직적이고도, 기둥이 천장으로 연결되며 시선을 유도하는 확장성의 원리 대신에 다시 건축에 등장한 돔을 기준으로 한 수평적이며 중앙집중적인 건축 원리가 등장한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또한 회화에서는 성서 속의 인물이 아닌 일반인이 비로소 회화의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섬세한 선묘가 사용되며 원근법을 사용, 중세 회화가 시각적 사실성보다는 회화의 소재인 성서의 스토리 전달에 목적이 있었던 것에 비해 르네상스 회화는 시각적 사실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르네상스 발상지의 자연적, 경제적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기품이 넘치고, 전반적으로 밝고 쾌활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한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이와 같이 르네상스 예술에는 건축이나 회화 모두 '일관된 통일성'이라는 형식 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보다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선묘와 원근법 활용의 예


영국과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다성 성가


 르네상스 시대의 성가는 영국과 지금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네덜란드를 포함하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예전에는 네덜란드악파라고도 했다)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루었다.  

 르네상스 초기인 15세기 영국의 작곡가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80~1453)의 다성 음악(바로크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기악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음악이라면 성악, 즉 성가를 뜻한다)은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감상의 예 6-1)

영국의 르네상스 음악을 대륙에 전한 존 던스터블

 존 던스터블 등에 의해 영국에서 시작된 포부르동(faux-bourdon) 기법과 테너식 미사는 바로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효시인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400~1474) 의해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에 전수되었다.

# 포부르동 기법: 그동안 사용되지 않던 3도, 6도 음정의 불협화음을 도입하여 거짓된(faux) 유사 저음 성부(bourdon)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법.

# 테노르식 미사: 디스칸투스(지금의 소프라노) 성부가 아닌 테노르(지금의 테너) 성부가 정선율을 담당하는 성가로 이루어진 미사.

# 기욤 뒤파이는 세속음악에서 정선율을 차용, 디스칸투스 성부에 배치하는 칸틸레나 미사와 테노르 성부에 배치하는 패러디 미사도 작곡했다.


 프랑코 플랑드르악파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양식적 발전을 거듭했다. 기욤 뒤파이와 함께 동시에 활동한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작곡가로는  

질르 뱅슈와(Gilles Binchois, 1400~1460)가 있으며, 이들 두 작곡가가 활동했던 시기를 1기 프랑코 플랑드르악파라고 지칭한다.

 제2기의 프랑코 플랑드르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요하네스 오케겜(Johannes Okkegem, 1420~1495)과 조스켕 데 프레

(Josquin Des Pres, 1450~1521)가 있다.

 또한 제3기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작곡가로는 니콜라 콩베르(Nicholas Gombert, 1500~1560)와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1532~1594)가 있다. (감상의 예 6-2)


2기 프랑코 플랑드르 악파의 거장 죠스캥 데 프레


 모두 3기에 걸쳐 프랑코 플랑드르악파는 미사 양식에 있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제1기에서부터 세속 음악의 선율을 정선율로 사용한 칸틸레나 미사와 패러디 미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오케겜은 '카논식 미사'를, 디 라소는 '순환식 미사'와 '연속 모방형 미사'를 창안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사의 차이는 악곡의 형식으로서 음악사에서 깊게 다루기에 부담스럽고 작곡법에 연관이 더 많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세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작곡된 형식으로 모테트(motet)가 있다. 모테트의 가사는 종교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중세 시대의 모테트가 각 성부마다 상이한 가사를 가지고 있었고, 일정한 리듬 패턴을 지닌 동질서 리듬의 유지에서 벗어나 모방 모티브를 가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변화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음악과 가톨릭 성가의 쇄신


 1517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의 길을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종교의 개혁은 전례의 개혁으로 이어져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성가를 대체하는 음악 형식이 등장했다. 그것이 코랄(Choral)이라는 코랄 모테트 형식의 찬송으로서 한음으로 제창할 수 있는 단성 코랄과 다성 코랄이 함께 작곡되었으며, 가톨릭 성가에 비해 단순하고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34~1612), 요하네스 에카르트(Johannes Eccard, 1553~1611), 그리고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60~1629)가 있으며,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자신도 새로운 코랄을 작곡했다. 코랄은 이후 바로크 시대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인 칸타타의 기초가 된다. (감상의 예 6-3)

 또한 독일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른 이유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된 영국 국교회에서도 앤섬(anthem)이라는 모테트 형식과 일종의 크리스마스 캐럴인 칸티쿰(canticum)이라는 찬송 형식을 사용했다.

 앤섬에는 무반주 합창으로 구성된 풀 앤섬(full anthem)과 독창, 혹은 독창과 합창, 그리고 기악까지 함께 하는 버스 앤섬(verse anthem)으로 구분되며, 우리가 성공회라고 부르는 영국 국교회가 강세인 영어권 국가에서 널리 불리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 1510~1585), 윌리엄 비어드

(William Byrd, 1542~1623), 토마스 톰킨스(Thomas Tomkins, 1572~1656)가 있다. (감상의 예 6-4)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의 근간이 이들 코랄과 앤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한편, 종교개혁에 따라 보다 부르기 쉬워 흡인력이 강한 프로테스탄트 음악에 자극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어려워지고, 세속 음악을 정선율로 사용하는 등 세속화된 성가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 교회에서 형성된 로마악파의 지오반니 피에르 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는 공의회의 뜻을 따라 무반주의 '아 카펠라' 성가를 작곡하고, 폴리포니보다는 부르기 쉬운 호모포니를 채택했다. 그리고 세속 선율을 사용한 패러디 성가를 금했다.(이는 초기에만 지켜졌다.) 또한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니 기법과 이탈리아의 선율이 결합된 음악을 작곡하고자 했다.

 로마악파의 성가는 스페인에 영향을 끼쳐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Thomas Luis de Victoria, 1548~1611)라는 르네상스 후반기를 대표하는 거장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의 다성 음악은 르네상스 성가가 들려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들려준다. (감상의 예 6-5)


 그리고 로마악파와 함께 르네상스 후반기에 활동한 베네치아악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악파가 가톨릭 성가의 순수성 회복을 위해 활동할 때 베네치아악파는 이와는 달리 분할 합창 기법(8성부의 합창을 두 개의 4성부 합창으로 나누어 공간을 활용하는 기법)을 사용한  '다중합창구조'와 성가에 기악을 도입, 기악과 성악이 교차하는 '콘체르탄테 기법' 등 새로운 작곡 기법을 창안했다.

 베네치아악파는 당시에 주류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앞서 구현했으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5~1586)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음악과 기악의 발달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 시대의 종교적 굴레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시대라면 당연히 세속음악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는 이전보다 세속음악이 활짝 꽃을 피웠던 시대였다. 다성음악의 형식적 발달로 성악적 표현력이 확장되었으며, 기악의 표현 영역 또한 확대되었다. 물론 기악 음악이 온전히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바로크 시대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바로크 시대에 기악 음악이 발달하는 토대를 르네상스 시대에 놓았다고 할 것이다.

 이제 이 단락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 음악을 간략하게 고찰해 보기로 한다.

 르네상스의 세속음악은 지역적 특색에 다른 형식으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우선 프랑스에서는 샹송(chanson)과 궁정 아리아(air de cour)가, 이탈리아에서는 프로톨라(frottola), 빌라넬라((villanella), 마드리갈(madrigal) 등이, 영국에서는 에어(ayre), 스페인에서는 비얀시코(villancico), 그리고 독일에서는 리트(lied)가 발달했다.

 이들 세속 성악곡 중에서도 샹송과 마드리갈, 에어가 특히 음악사적으로 중요하여 개별적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먼저 샹송은 중세의 세속음악인 트루베르의 노래에 기원을 두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형식으로 프랑코 프랑드르 악파의 발전과 함께 그 변화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기욤 뒤파이와 질르 뱅슈와로 대표되는 제1기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에서 샹송은 3성부로 이루어져 멜로디를 상성부가 담당하고 나머지 두 성부는 기악으로 연주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샹송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콩베르에 이르러 4성부로, 오를란도 디 라소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6성부로 확장된다.

# 샹송 부르기논: 샹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질르 뱅슈와가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에 속해 있었기에 붙은 명칭으로 3성부로 구성되었다.

# 샹송 파리지엔느: 콩베르가 활동하던 시기에 4성부로 이루어졌으며 파리에서 성행했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 프로그램 샹송: 6성부 샹송으로 마드리갈의 영향을 받아 반음계를 사용하고 가사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사를 중요시해서 공통된 주제의 가사에 맞추어 여러 샹송을 작곡하는 형태.


 1530년 경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마드리갈은 아마도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음악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음악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즉 인간의 정서가 가장 잘 표출된 음악 형식이 르네상스 마드리갈이다.

 음악의 내용으로 볼 때 마드리갈의 주제는 다양했는데 사랑은 물론 생활 속의 유머, 종교, 정치적, 사회적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음악의 형태로는 프랑코 플랑드르악파의 모테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마드리갈은 종교적 내용의 모테트에 대응한 세속적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마드리갈은 시기적으로 3단계의 변천을 겪었지만 섬세한 표현력과 감성의 극대화가 절정에 달한 1580~1620년의 시기에 루카 마렌치오(Luca Marenzio, 1554~1599)와 카를로 제수알도(Carlo Gesualdo, 1560~1613),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등의 작곡가들이 마드리갈을 작곡했다.

 르네상스 마드리갈은 주요 작곡가의 한 사람인 몬테베르디가 대표적인 바로크 장르인 오페라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의 말기 양식으로서 마드리갈이 있었기에 바로 크 시대에 오페라가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제수알도는 반음계를 과감하게 구사, 인간의 감정 표현을 극대화함으로써 가장 개성적인 음악을 남겼다. (감상의 예 6-6)

제수알도의 음악적 특징을 잘 표현한 초상

 

 영국의 세속음악인 에어는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여왕 재위 시에 절정을 이룬 장르로 류트가 반주를 담당하므로 류트송이라고도 한다.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가 대부분으로 서정적인 선율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존 다울랜드

(John Dowland, 1562~1625), 토마스 캠피온(Thomas Campion, 1567~1620)이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감상의 예 6-7)

에어의 대표적인 작곡가 존 다울랜드


 중세 시대에 춤의 반주에 머물던 기악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연주 양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온전히 기악이 음악의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은 바로크 시대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주로 성악곡을 기악으로 편곡한 형태의 음악이나 기악을 위한 판타지아나 변주곡, 파반느가 주를 이루며, 오르간이나 류트, 버지날을 위한 독주 기악곡도 있었다.


 15~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예술은 조형 예술의 성과가 그렇듯 중세 시대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에 빛나는 성과를 이루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르네상스 음악이 지닌 빛나는 음색과 순수한 음향은 천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힘이 있다. 뒤를 이은 바로크  음악과 비교해서도 그렇다. (감상의 예 6-8)





감상의 예 6-1)

존 던스터블의 모테트, 얼마나 아름다운지(Quam pulchra es): 구약성서의 솔로몬의 노래를 텍스트로 사용했다.

https://youtu.be/nxFNkcI8K4A


감상의 예 6-2)

오를란도 디 라소의 모테트, 내 영혼이 슬프나니(Tristis est anima mea)

https://youtu.be/na6DOgZ6fXg


감상의 예 6-3)

마르틴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 unser Gott)

https://youtu.be/nDdHtOSHIXE


감상의 예 6-4)

토마스 탈리스의 스팸 인 알리움(Spem in allium, 소망되시는 주): 40성부를 위한 대편성 모테트.

이 장엄한 음악을 킹즈 싱어스가 4번 녹음하여 결합한 영상.

https://youtu.be/XJDLQZWKWe8


감상의 예 6-5)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의 모테트, 오 위대한 신비여(O magnum mysterium): 성탄의 경이를 노래한 4성부 모테트.

https://youtu.be/QT5K-GxDHyM


감상의 예 6-6)

카를로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나는 사라지듯 그렇게 슬픔으로 죽어가네(Moro, lasso, al mio duolo): 반음계 화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https://youtu.be/WDtRD0KrJYA


감상의 예 6-7)

존 다울랜드의 에어,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Flow, my tears)

https://youtu.be/u3clX2CJqzs


감상의 예 6-8)

알레그리의 미제레레(Miserere mei, 불쌍히 여기소서): 르네상스 음악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음악.

https://youtu.be/06NsfHIXBYc



 


 




 

매거진의 이전글 Almost Christian(거의 기독교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