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산책하던 산자락에도 봄이 찾아왔다. 봄이야 진작에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명확한 확인을 요구한다. 조금만 자연에 마음을 쓰고 오감을 집중한다면 봄은 일찌감치 우리 곁에 다가와 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우리의 게으른 몸은 두 눈으로 꽃의 모습을 확인해야 비로소 봄이 왔다고 마음이 인정하는 것이다.
며칠 전 하룻밤 내내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봄이 우리에게로 성큼 다가오게 만들었다.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 이렇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언젠가 또다시 겨울이 오는 것, 이처럼 추운 겨울에 뒤이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리라는 기대와 이를 어기지 않는 자연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혹독한 계절을 견딘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시련에 직면했을 때 자연에서 배운 대로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도 끝나리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처럼 돌고 도는 순환의 원리에서 인도인들은 윤회사상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 식물을 키우고, 이 식물을 먹고 사람을 비롯한 생명을 살린다. 죽어 몸을 떠난 영혼은 하늘(저승)로 올라간다는 단순한 생각이 윤회라는 사상을 잉태한 것이다. 하늘의 달을 보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49일 동안 중음신이 되어 머물다 가는 곳으로 상상, 49제의 기초가 되었다. 윤회사상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고대 인도인들의 순수한 직관력이 놀랍다.
그렇게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우리는 봄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리는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호흡한다. 언젠가는 자연이 생명력을 잃고 침잠하는 계절로 접어들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마음껏 생명력을 발산할 시간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 성장기를 지나 한때 젊음에 머물다 소멸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도 우리는 젊음에 오래 머물 수 있기를 갈망하고, 설혹 나이가 들어 젊음이 내 몸에서 조금씩 떠나가는 것을 느낄지라도 이에 반비례해서 깊이를 더해가는 인생에 자족 지심을 가지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노화라고 말하는 신체적 퇴행 현상을 증가하는 인생의 연륜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가급적 젊음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바람처럼 용이하지 않기에 아쉬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젊음의 시간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의 헐벗고 스산한 풍경을 유독 좋아했다. 기우는 햇살이 연출하는 겨울의 앙상한 실루엣이 좋았다.
모르겠다. 겨울의 이미지처럼 가식 없이 솔직한 인생이 되기를 원했는지, 아니면 그 시대가 겨울과 같이 헐벗어 삭막한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겨울에 내가 머물 때 느끼는 동질감으로 해서 마음이 편안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점점 봄이라는 계절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육신이 노화를 겪어 생명력에 탄성을 잃어가면서 생기는 심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심각해할 필요는 없다. 육신의 노화도, 이에 따른 심리적 변화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봄을 선망하는 마음이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 계절의 기운을 맘껏 호흡하면서 삶의 활력을 찾아갈 일이다. 육신은 지쳤어도 마음만큼은 젊은 활력을 잃지 않도록 하자. 항상 마음을 젊게 가지고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가지도록 애쓰자.
산자락의 산책로 초입에 심긴 산수유에 노란 꽃이 소담하게 피었다. 비가 그친 후 산자락 길에도 봄이 찾아온 것이다.
문득 문태준 시인의 시 '산수유나무의 농사'가 떠올랐다.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사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이 시를 생각하며 걷는 산자락 길에서 봄을 보는 마음 자락도 봄에 물든다. 산수유를 바라보며 나도 올봄에는 마음 농사 한번 잘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