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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May 12. 2022

바로크 음악의 종결자(終結者), 바흐

- 새롭게 읽는 서양 음악사(9)


바흐의 생애와 음악사적 의의


 요한 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an Bach, 1685~1750)라는 대음악가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생애에 음악사적 의의를 부여한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훗날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광범위한 연주 여행을 통해 유럽 각 지역의 음악 경향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바흐 또한 자신의 직장이랄 수 있는 독일 내 궁정 악장과 교회의 칸토르를 옮겨 다니며 음악 활동을 했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럽의 다양한 음악 경향을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고용주의 요구나 직분의 필요에 의해 작곡의 범위를 넓힐 수가 있었기에 그 생애의 중요성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바흐는 독일 튀링겐의 아이제나흐에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에 모여 거주하는 바흐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음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바흐가 음악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직업으로서의 음악은 대를 이어 물려받는 경우가 크다.

 그러나 이 글이 전기가 아닌 이상 직업적 음악가로 성장하기 이전의 바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아른슈타트 시대라고 일컫는 음악 활동의 초기에는 동향의 음악가로서 뤼네부르크의 성 요한 교회의 칸토르(Cantor, 간단히 말하면 성가대 지휘자를 뜻하겠지만, 교회의 음악 책임자라는 표현이 적합하다)로 제직하고 있었던 게오르크 뵘(Georg Bohm, 1661~1733)과 뢰벡에서 활동하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이들 두 사람이 오르간 음악에 뛰어났던 만큼 이 장르에 영향이 컸을 것이다. 실제로 오르간 음악을  위주로 초기작들이 남아있지만 연대상으로 논란이 있어 함께 언급하지 않는다.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교회의 구성원들과 불화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수준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음악과 오르간 음악에 편중된 활동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중 바흐는 1707년 같은 튀링겐 지역의 뮐하우젠에 있는 블라지우스 교회에 칸토르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바흐의 뮐하우젠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바흐는 교회를 위해 칸타타를 주로 작곡하게 되지만 1년 후 바이마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바이마르 시대에 바흐는 교회가 아닌 궁정에서 봉직하게 된다. 주된 일은 오르간 연주였으며, 궁정 악단 내에서 그의 지위가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 교회에 필요한 교회음악을 작곡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까닭에 바흐의 오르간 곡 대부분을 이 시기에 작곡할 수 있었다. 

 바흐가 바이마르의 궁정 악단에서 최고의 지위인 악장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교회음악인 칸타타를 작곡,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에 작곡된 칸타타는 규모가 작은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중요한 축일을 위한 칸타타는 보다 큰 규모로 작곡할 수 있었다. 이때 작곡된 대표적인 칸타타로는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 BWV. 4와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 61, 그리고 '마음과 과 행동과 생명으로' BWV. 147이 있어 지금도 사랑받는 곡들이다. (감상의 예 9-1)

 바이마르에서 바흐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비로소 직업적인 음악가로서 큰 걸음을 내딛게 된다.

 비록 칸타타는 훗날 라이프치히에서 이룬 성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오르간 음악에 있어서는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오르간 작품으로는 '토카타와 푸가' BWV. 538, '토카타와 푸가 F장조' BWV.540, '환상곡과 푸가 g단조' BWV. 542, 그리고 '파사칼리아' BWV. 582가 있다. (감상의 예 9-2)

 흔히 바이마르에서의 바흐의 성과에 대하여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이마르에서 바흐가 남긴 작품 만으로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에서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이후 바흐가 남긴 업적이 '위대한'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바흐는 1717년 8월에 안할트- 쾨텐 공국의 레오폴트 공의 초청으로 궁정악단의 악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바이마르의 빌헬름 에른스트 공은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를 놓아주지 않아 12월에야 바흐는 쾨텐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쾨텐 시대 바흐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칸타타 작곡이 급격히 줄어들고, 순수한 기악 음악곡의 작곡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쾨텐의 레오폴트 공이 기악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도 있지만 칼빈교도인 레오폴트 공이 루터교의 교회음악인 칸타타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실한 루터교도인 바흐로서는 아쉬울 수 있는 사실이지만 덕분에 바흐는 기악 음악 작곡에 몰두, 그야말로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바흐 또한 쾨텐에서의 생활에 만족했었던 것 같다.

 수많은 기악곡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지만 이 방면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 1046~1051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 2권' BWV. 846~893,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 1001~1006,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가 쾨텐에서 탄생했다. (감상의 예 9-3~6)

쾨텐의 궁정과 정원의 모습


 1723년 바흐는 쾨텐을 떠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취임하게 된다. 궁정에서 교회로 임지가 변경된다는 것은 교회음악이 바흐의 음악 활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쾨텐에서 기악음악의 창작에 열중했던 바흐는 모처럼 라이프치히에서 죽을 때까지 교회음악의 창작에 몰두, 120 여곡의 칸타타를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성악곡 대부분을 라이프치히 시대라고 일컫는 이 시기에 작곡한다. 그 대표적인 곡이라면 'b단조 미사' BWV. 232, '마태 수난곡' BWV. 244, '요한 수난곡' BWV. 245,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 248 등의 빛나는 대작들과 모테트, 마니피카트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성악곡을 남기게 된다. (감상의 예 9-7~9)

 물론 이때 작곡된 칸타타 또한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교회의 칸토르로 봉직하면서 매 주일마다 예배에 사용할 새로운 칸타타를 의무적으로 작곡했으니 보통 중노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흐가 일찍 시력을 잃은 것이 이와 무관치가 않을 것이다. 매일 밤을 새워 악보를 그려야 했으니 시력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성악곡만 작곡한 것은 아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골드베르크 공의 청탁으로 작곡되었다는 일화(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가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과 '음악의 헌정' BWV. 1079, '푸가의 기법' BWV. 1080처럼 무게 있는 기악곡들도 라이프치히에서 작곡되었다. (감상의 예 9-10)

성 토마스 교회 바닥에 안치된 바흐의 유해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


 흔히 바흐를 일컬어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을 입바른 호사가들의 수사라고만 할 수 없는 점이 바흐의 음악에 있다.

 먼저, 바흐는 바로크 음악 양식들을 자기 것으로 흡수, 완성했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다. 바로크 음악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장르인 오페라를 바흐는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흐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던 이유를 추측할 때 크게 두 가지 사실을 가정할 수 있다. 첫째로는 오페라가 바흐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아 바흐가 오페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때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음악가는 교회나 귀족과 왕족의 궁에 속한 하인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음악을 작곡하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오페라 극장을 운용하고 있었던 궁에서 오페라를 작곡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흐가 바이마르의 궁에서 일했을 때 맡았던 직무의 영역이 오르간 곡의 작곡과 악단원으로 연주에 참여하는 것에 머물렀기에 오페라를 작곡할 기회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쾨텐의 궁에서 봉직하고 있었을 때에는 쾨텐의 레오폴트 공이 엄격한 칼빈교도로서 화려한 칸타타조차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악곡 작곡을 독려했기에 오페라의 작곡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궁에서 봉직할 때에도 오페라를 작곡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로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색한 표현이지만 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을 일컬어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흐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던 반면, 헨델이 오페라와 합창 음악의 거장이었다는 점에서 바흐의 영역을 보완하는 측면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실 헨델이 독일과 영국에서 활동,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진(헨델의 개방적인 음악 스타일에서 국제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가였다면 바흐는 그 인지도가 독일이라는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해 당시 독일 최고의 음악가라면 북부 함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이 있었다. 바흐가 덜 알려졌다는 점, 그래서 임지에 변동이 았다는 점이 오히려 바흐로서는 자신의 음악을 완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오르간 음악에 있어서 독일 북부 양식과 남부 양식을 통합했고, 프랑스 양식마저 도입,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또한 쾨텐에서는 기악 독주곡을 작곡, 독주 악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콘체르토 양식을 완성한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음악 스타일을 흡수,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 1046~1051 외에도 '2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BWV. 1041~1042,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BWV. 1043 등의 협주곡을 남겼다. (감상의 예 9-11)

 지금은 바흐가 서양 음악사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오랜 세월을 바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교회음악과 기악 음악에서 그가 쌓은 업적의 많은 부분이 잊혀 있었다. 예를 들면 '음악으로 쓴 신약성서'라고 불리는 '마태 수난곡'은 19세기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있던 펠릭스 멘델스존이 악보를 발견, 연주하기 이전까지 바흐의 사후에 잊혀 있었다. 또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20세기에서야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 다년간 연구 끝에 1930년대에 최초로 음반을 녹음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바로크 식의 칸타타는 더 이상 작곡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칸타타는 바로크 시대의 시대 양식인 셈이다. 그러나 바흐에 의해 기악곡에 녹아있는 대위적인 음악 구조는 지난 시대의 음악이 아니라 후대의 음악가들이 창작의 자양분으로, 연주의 기본으로 삼아 항상 가까이하는 불멸의 음악이 되었다. 따라서 바흐의 위대함은 한 시대의 완성이면서 이후의 시대에도 음악적 지침으로서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할 것이다.

서양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작품번호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음악 작품에는 작품번호(Opus Number: op.)라는 것이 따라붙는다. 이는 출판사에 의한 악보 출판 번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베토벤 이후에 정착된 것이다. 그러니까 작품번호를 알면 그 음악이 작곡자의 초기작인지, 아니면 후기작인 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작곡자의 작곡 연대와 악보 출판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슈베르트가 대표적인 경우로 슈베르트가 작곡한 기악곡의 많은 양이 작곡가 생전에 발표되지 못하고 사후에 발표된 것이었다. 이를 경우 작품번호가 작곡의 연대 인식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음악학자 도이치가 연구, 연대순으로 정리한 도이치 번호(D.)를 병기한다.
 그리고 작품번호가 정착하기 전 작곡가들의 음악에는 하이든의 경우 음악학자 호보겐이 정리한 호보겐 번호(H.)가,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음악학자 쾨헬의 이름을 딴 쾨헬 번호(K.)가 사용된다.
 이전의 음악가에도 별도의 작품번호를 사용하는데 바흐의 경우 바흐 작품번호(BWV.)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번호는 작품의 연대기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작곡한 음악을 장르별로 분류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바흐 음악의 핵심인 칸타타를 BWV.1~ BWV. 215에 배치시켰다.






감상의 예 9-1)

칸타타 '마음과 말과 행동과 생명으로' BWV. 147 중에서 코랄 '나의 기쁨 되시는 예수'

최소한의 성악진과 오르간, 그리고 오블리가토인 오보에로만 구성한 실내악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연주.

실제로 바흐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규모가 있는 합창이 아닌 소규모 성악진으로 편성하여 칸타타를 연주했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T5Df7f_BLU8


감상의 예 9-2)

환상곡과 푸가 g단조 BWV. 542

https://youtu.be/tgDE3klkmtQ


감상의 예 9-3~6)

쾨텐에서 바흐가 작곡한 기악곡들은 각 분야와 집대성이자 각 악기의 기법에 있어 교과서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 BWV. 1050 중 1악장(빠르게)

https://youtu.be/hcpqxQCq-UM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 중 전주곡 BWV. 846

 https://youtu.be/gVah1cr3pU0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2번 BWV. 846 중에서 샤콘느

https://youtu.be/StHJv84o5oI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BWV. 1007 중에서 전주곡

https://youtu.be/mgeqeZbWDek


감상의 예 9-7~9)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일련의 대작들은 그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b단조 미사' BWV. 232 중에서 '글로리아'

https://youtu.be/cqxC8NvlVdY


'마태 수난곡' BWV. 244 중에서 알토 아리아 '자비를 베푸소서, 나의 하나님'

 알토 대신에 남성 카운터테너를 기용했다. 바흐 당시에는 카운터테너라는 성역이 없었고, 알토 파트와 소프라노는 변성기 이전의 소년 성가대원이 맡아서 불렀다.

https://youtu.be/Zry9dpM1_n4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 248 중에서 제1곡 합창 '축하하라, 이 좋은 날을'

 성탄의 기쁨이 가득한 곡이다.

https://youtu.be/QZIQDzUeeYI


감상의 예 9-10)

주제인 아리아와 30곡의 변주로 이루어진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은 후대의 기악 변주곡에 큰 영향을 준다.

 아리아가 연주되고, 이어 30곡의 변주와 마지막에 다시 아리아가 연주되는 순환 형식의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https://youtu.be/chQ7cbSUU-s


감상의 예 9-11)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 1043

 오블리가토 악기와 어울린 칸타타의 아리아와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들을 때 바흐의 음악이 얼마나 감성적인 음악인가를 깨닫게 된다.

https://youtu.be/fzUdwPqB3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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