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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Jul 10. 202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 밤과 꿈의 신앙 에세이(14)

 지난 목요일에 오래전에 문화 사역을 함께 했던 목사님을 7년 만에 만났다. 한 교회의 담임으로 미국에서 목회를 시작한 이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터라 반가움이 컸다. 특히 꼬맹이 때 보았던 세 아들을 동반한 방한이라 의미가 각별했다.

 이렇게 목사님을 다시 만나는 감정이 남다른 데에는 안타까운 목사님의 가정사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사님은 국내 목회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학구열이 남달랐던 사모님의 신학 공부를 곁에서 돕기 위해 가족이 함께 도미, 1년 동안 미국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모님은 유방암 3기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 예정했던 1년의 일정은 사모님의 투병으로 4년이 되었고, 결국 사모님은 천국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일본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동양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중국 산둥대학교에서 주역을 공부했으니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목사님이 미국에서 결혼의 조건으로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한 사모님을 만나 콜롬비아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아예 신학과 종교학에 대한 공부를 이어갔으니 예사롭지 않은 회심의 예라고 하겠다.

 목사님의 특이하고도 화려한 이력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다른 목사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사유의 폭넓음과 여유가 느껴지는 행동이 인상적이다. 목회자와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목사님처럼 편안함을 느낀 경우가 별로 없다. 그것은 전도사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기에 가능한 편안함이 크겠지만, 목사님의 인문학적 소양에서 오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크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신학적 이해와 신앙만큼 목회자에게 중요한 자질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이해는 삶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간접적인 경험에서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님이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는 목사님의 인문학적 소양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세 명의 아들을 키우면서 보다 깊이를 더했으리라 생각한다.

 사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목사님에게는 두 곳의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이 왔었다고 한다. 한 곳은 보다 큰 도시에 있는 한인 교회로 천 명 정도의 교인을 가진 중형 교회였고, 결국 목사님이 선택한 교회는 작은 도시의 백 명 남짓한 교인으로 구성된 작은 교회였다.

 두 교회를 두고 고민하면서 선배 목사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큰 교회를 간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지만, 작은 교회를 간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다”라고 했단다. 물론 다른 목사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선택은 목사님의 순종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목사님이 담임하게 된 교회는 당시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교인들 간에 고소, 고발이 난무했고, 이 결과 출교 된 장로도 있었고 당회마저 폐당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이처럼 어수선하다 보니 전임 목회자들이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목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한 후 노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 어쩌자고 여기를 오셨어요? 내가 이 교회에서 목사님 일곱 분을 모셨는데 한 분은 돌아가셨고, 여섯 분이 질려 떠나가셨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사님은 그 문제 많은 교회의 8대 담임 목사가 되어 7년째 교회를 섬겨 오고 있다. 그 비결을 묻는 질문에 목사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흔하게 하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목사님의 체험이 이 말의 진실에 공감할 수 있다. 의료보험 미가입으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한 달에 우리 돈으로 일억 원까지 청구되는 병원비를 감당할 처지가 못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4년 간의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한 것, 먼저 입원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목사님의 딱한 처지를 전해 들은 병원의 흑인 여직원이 “내가 반드시 입원시키겠다”라면서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케 한 것, 사모님이 다니던 신학교에서 그 신학교의 교수들이 사후에 매장되는 교내 묘지의 한 자리를 사모님에게 내어 주고, 금년에는 사모님의 이름이 새겨진 벤치를 교내에 설치한다는 것 등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말하기 힘든 일들을 목사님은 경험했다.

 세 아들의 양육 또한 간단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담임으로 청빙 될 때 목사님의 가정사를 알고 있던 교인들이 아직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자신들이 잘 돌보겠다고 했다지만, 남자 혼자서 세 명의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 첫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학교에서 영화와 디자인을 3년째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금년에 대학교에 입학, 수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리고 막내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목사님을 볼 때 분명한 것은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인지 확신을 가지고 표현하기에는  질문의 울림이 너무 커서 글로 답을 담아내기에는 표현력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목사님의 인생과 목회 여정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하고 선교에 힘쓰는  또한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일이다. 우리는  일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봉사와 구제, 선교 활동에는 반대급부로 자기만족이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목사님의 삶이 자기만족을 느낄 만큼 여유롭지 않고 항상 급박한 상황에 머물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장하면서 목사님에게 속내를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장남이 최근에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신학을 공부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목회를 하겠다고 이곳에 우리를 데리고 들어오는 아버지가 그때는 정말 미웠다라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이 목사님의 희생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희생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이고, 목회자의 가족이니까 그런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희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믿음의 크기가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희생은 사랑이고, 사랑은 곧 희생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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