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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Aug 14. 2022

슈베르트, 낭만주의의 외로운 꽃

- 새롭게 읽는 서양 음악사(13)


낭만주의 초기의 전개 양상


 낭만주의(romanticism)는 계몽주의가 표방하는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했다. 문학과 예술의 사조를 살펴볼 때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음악에서는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정치적인 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계몽주의의 절대 왕조가 퇴보한 데다 결정적으로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직된 국민의회에 의해 공화정이 시작된 사건이 낭만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를 관통한 낭만주의 운동의 전개 양상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과정 모두를 언급할 생각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운동으로 시작된 낭만주의가 어떻게 미학 운동으로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인류 역사의 모든 과정이 그렇지만 긍정적인 이상으로 시작된 역사적 변혁이 이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낭만주의를 촉발시킨 프랑스 대혁명 또한 폭력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사회적 부작용을 가져왔다. 결국 혁명의 이상과는 달리 왕정의 복고를 가져오게 되지만, 이에 지식인들은 정치적 현실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좌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현실은 낭만주의의 좌표를 문학으로 옮기게 되고, 독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문학 운동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와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등에 의한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전까지 예술사와 문화사는 항상 건축과 조형예술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낭만주의에 들어서 그 흐름을 문학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낭만주의 문학 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된 것처럼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 음악의 중심도 독일로 완전히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


이상과 동경, 낭만주의의 미학


 이제 우리는 낭만주의를 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 노발리스(Novalis, 1772~1801) 등에 의해 이론화한 미학, 즉 19세기에 전개된 문학과 예술의 정신 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가 낭만주의를 문학과 예술의 분야로 한정 지어 고찰한다고 해도 본래 낭만주의는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낭만주의가 유지하는 현실적 거리, 우리는 이것을 낭만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이상(Idea)’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상으로 나아가는 변혁적인 힘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때 ‘낭만적’이라는 것은 ‘혁명적’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또한 ‘근대성’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예술의 정신 운동으로서의 독일 낭만주의는 출발에서부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낭만주의의 ‘이상’은 계몽사상이 가진 보편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개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주관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하게 문학에서 낭만주의의 이상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서 ‘사랑’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궁극적 가치인 사랑을 이루게 하는 동력으로서 ‘동경’의 개념이 낭만주의에서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어 이를 내용으로 하는 ‘동경 문학’이라는 장르가 탄생되었다. 이 모두가 현실과 거리를 두는 낭만주의의 태도로서 ‘환상’이 또한 낭만주의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고독하게 이상을 추구하는 ‘천재’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되는 것도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이다.

초기 낭만주의의 이론을 정립한 노발리스


리트, 가장 낭만적인 장르가 되다


 앞서 낭만주의는 문학이 주도하는 예술 사조라고 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낭만주의 시대에서는 문학과 음악이 자매라고 비유할 만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에 음악을 붙인 ‘리트(lied)’라고 할 것이다. 리트는 독일의 예술가곡이다. 그리고 민네징어(음유시인)의 전통이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었던 독일에서 리트의 역사는 그 시원이 오래된 것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에서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크라우제, 술츠, 첼터 등에 의해 리트가 작곡되었고,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물론 베토벤까지 지금도 인기 있는 리트를 작곡했다. 그러나 리트는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전의 리트가 가사가 되는 시의 의미보다는 선율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면 슈베르트에 이르러 비로소 시와 음악이 균형감 있게 조화를 이루는데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때 피아노도 노래를 보조하는 단순한 반주 기능에서 벗어나 인성과 마찬가지로 시의 표현을 구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악곡의 형식도 단순하게 선율이 반복되는 ‘유절 형식’보다는 음악의 시종이 다른 선율로 이루어진 ‘통절 형식’을 주로 사용, 시가 가진 표현력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슈베르트의 리트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슈베르트의 재능이 작품에 투영되었던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의 나이 14살이었던 1811년에 작곡된 최초의 리트인 ‘하가르의 탄식’을 비롯한 최초의 작품군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발라드 풍의 평범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12년에 작곡된 ‘탄식의 노래’는 단순한 유절 형식의 노래이지만 이미 베토벤의 원숙기 양식에 도달해 있어 슈베르트의 재능이 일찍 개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년 슈베르트의 초상

 무엇보다도 리트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의 천재성을 드러낸 최초의 작품은 1814년,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최초의 작품인 ‘물레 잣는 그레트헨’이라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나이 17세에 작곡된 이 곡은 음악적인 요소와 극적인 요소, 즉 음악과 시가 균형감과 일체감을 구현하고 있다. (감상의 예 13-1)

 이처럼 슈베르트는 그의 선배들이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미답의 경지를 10대의 나이에 개척, 그의 나이 18세인 1815년에는 보다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는데 유명한 ‘마왕’과 ‘들장미’가 이때 작곡된다. (감상의 예 13-2, 3)

괴테의 유명한 시 ‘마왕’을 묘사한 그림

 600 여곡에 이르는 리트를 샘솟는 악상에 따라 작곡했던 슈베르트의 리트 음악을 연대기에 따라 언급한다는 것이 지난한 일일 수 있다. 따라서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인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와 연가곡은 아니지만 슈베르트의 사후에 미발표 리트곡을 모아 출판한 ‘백조의 노래’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연가곡이라 함은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연작시를 텍스트로 작곡된 리트의 모음을 뜻하는 용어로 적절한 번역을 찾지 못해 다소 한국적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1823년에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24년에 악보를 출간한 20곡의 리트로 이루어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는 빌헬름 뮐러의 시를 텍스트로 하고 있다. 뮐러의 시는 결코 뛰어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슈베르트의 선율을 입어 시적인 매력이 오히려 배가되고 있다. 이 곡들은 후속작인 ‘겨울 나그네’가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그 내용이 물레방앗간 집의 딸을 사랑한 젊은이가 사랑을 잃고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는 절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가 지닌 정열과 순수한 감정이 잘 나타난 매력적인 음악이다. (감상의 예 13-4, 5)

지금도 실재하는 물레방앗간의 모습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또한 빌헬름 뮐러의 시를 텍스트로 한 음악이다. 이 가곡집에 속한 24곡들을 작곡할 때 슈베르트는 그 성과에 대하여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리 슈베르트의 노래로 이 곡들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전반적인 음악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가 결국 성공하리라 자신했었던 것 같다. 그만큼 ‘겨울 나그네’는 그의 분신과 같은 음악이었다. 이 음악을 작곡할 때 슈베르트는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었던 매독균에 감염, 그 증세가 악화되고 있던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음악은 희망은 보이지 않고 암울하다. 음악의 화자는 이미 실연을 하고 연인의 곁을 떠나 외롭고 긴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겨울 나그네’라고 번역하지만 원래 이 가곡집의 제목은 ‘겨울 여행’이다. 고행과 같은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감상의 예 13-6~10)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묘사한 삽화

 ‘겨울 나그네’는 내면적인 음악이다. 음악의 순간순간에 서정적인 따뜻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냉혹하다. 그런 점이 이 음악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지만, 바로 이런 점이 당시 슈베르트가 처한 현실적 상황이었고 슈베르트의 본질에 접근한 음악이라는 면에서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집의 하나로 불리는 백조의 노래는 연가곡집은 아니고 슈베르트의 사후에 미발표 상태로 있던 리트 14곡을 모아 악보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가곡집의 구성은 제1~7곡은 렐슈타프의 시, 제8~13곡의 6곡은 하이네의 시, 마지막 제14곡, 한 곡은 자이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연가곡집으로서의 일관성은 없지만 개별적으로 볼 때 한결같이 뛰어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독일 낭만주의 최고의 서정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리트를 들으면 하이네라는 대 시인을 슈베르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만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슈베르트는 하이네의 간결한 시에 음악적 상상력을 결합한다. (감상의 예 13-11~13)

원숙기에 도달한 슈베르트의 초상


 슈베르트의 리트가 가진 매력은 먼저 그의 음악이 가진 서정성이 우선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슈베르트에게 내재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선율의 분출은 그의 천분이며, 우리가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음악과 시의 긴밀함은 슈베르트의 리트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서 아직 두 예술의 완전한 합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음악과 문학의 일치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 볼프의 리트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서 음악과 문학의 상호 관계에 커다란 접점을 찾아가는 선구적 위치가 슈베르트가 작곡한 리트의 가치이자 매력이라고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슈베르트의 리트가 가진 매력은 작품이 지닌 성격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다. 슈베르트의 리트에서 들을 수 있는 다채로운 음악의 향연을 들으면 그동안 여가 음악에 지나지 않았던 리트라는 장르가 낭만주의 시대에는 왜 주류 음악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뒤늦게 개화된 기악음악의 성과


 우리는 중등과정의 음악 시간에 슈베르트에 대하여 ‘가곡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배운다. 리트 분야에서 슈베르트가 이룬 성과를 감안하면 틀린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강조하다 보면 기악 작곡가 슈베르트의 역량이 과소평가될 수 있고, 실제로 오랫동안 슈베르트의 기악음악은 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성악 음악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려서부터 미성이었던 슈베르트는 변성기가 되기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 소년 합창단(지금의 빈 소년 합창단)의 단원으로 있었다. 합창단원으로서 필수적으로 받게 되는 음악 이론이 교육 이외에 슈베르트가 작곡을 위해 별도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때 받은 음악 교육의 수준이 대단하지 않은 수준은 아니었다. 이 합창단의 기숙학교에서는 합창에 필수적인 성악 교육은 물론 작곡법을 비롯한 이론 교육과 궁정 오케스트라와의 합동 공연을 위한 교육, 실내악 등 비교적 체계적인 음악 교육이 이루어졌다. 오케스트라를 구성, 교향곡과 같은 대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오케스트라에서 제2 바이올린을 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슈베르트는 이때 교향곡의 구성 형식을 터득했고, 자신의 음악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이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가 슈베르트는 자신을 고전주의 시대의 틀 속에서 인식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베토벤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고, 자신을 고전주의의 음악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슈베르트 본인 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기악음악이 중심이 된 고전주의 음악가로서 슈베르트를 베토벤과 비교, 슈베르트의 기악음악을 폄하하고 슈베르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음악사적 평가가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슈베르트를 낭만주의 리트의 개척자라는 일면 만을 강조하는 평가가 정착된 것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기악곡들도 그의 리트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선율미로 가득한 매력적인 음악이다. 특히 이미 작곡된 리트의 선율을 취한 실내악곡들, 예를 들면 피아노 5중주곡 ‘송어’와 현악사중주곡 14번 ‘죽음과 소녀’와 같은 곡은 슈베르트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음악 목록의 상위를 차지한다. (감상의 예 13-14~15)


물론 고전주의의 시각으로 볼 때 슈베르트의 기악음악에는 논리적인 형식의 구성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의 연구 동향에 의하면 슈베르트의 기악곡들이 가진 특성을 슈베르트의 개성으로 볼 부분이지 고전주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방향으로 슈베르트의 기악곡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슈베르트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에 불멸의 기악곡 두 곡을 작곡한다. 슈베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b단조의 8번 교향곡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C장조의 교향곡 9번을 작곡한다. 8번 교향곡이 2악장으로 남겨진 것에 대해서는 2악장 만으로도 악상이 완성되어 더 이상 작곡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등 말이 많지만 확실한 내막은 알려진 것이 없다.

 9번 교향곡도 슈베르트 사후에도 논란이 많았던 곡이다. 우선 턱없이 긴 음악의 길이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이를 음악의 논리적 구성 능력의 부족으로 이해한 것이다. 베토벤을 존경했고 베토벤을 롤 모델로 생각한 슈베르트가 음악의 폭에 있어 베토벤의 교향곡에 필적하고자 하는 의욕이 작용했으리라. 훗날 슈만은 이 곡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에 견주어 말하면서 이 곡의 ‘엄청난 길이’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때문에 이 곡에는 ‘대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게 되었으며 흔히 기악 작곡가로서 슈베르트를 비판할 때의 예가 되었다.

 그러나 슈만이 말한 길이는 베토벤의 9번과 견주면서 이 교향곡이 가진 정신성의 크기를 말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이 교향곡이 훗날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한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을 예시한 선구로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교향곡에서 슈베르트는 ‘고전적 형식’과 ‘낭만적 정신’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동안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생각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평가이지만, 이 교향곡(그리고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에서 지적되는 지나치게 긴 길이는 끊임없이 샘솟는 서정적 선율과 이를 표출하는 슈베르트의 천재성이 드러낸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향곡이 표출하는 정신성은 고전적 양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슈베르트의 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가 표방하는 영원한 방랑과 동경과 같은 낭만주의의 정신성으로 이 교향곡은 낭만주의 교향곡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감상의 예 13-16)


 9번 교향곡을 작곡한 6개월 뒤 슈베르트는 그의 유작이 되는 C장조의 현악 5중주곡을 작곡한다. 작곡은 1828년에 이루어지지만 정작 이 곡은 1853년에야 출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이 곡은 슈베르트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도 개성적인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곡에는 못다 이룬 슈베르트의 꿈이 아프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룰 수 없는 음악적 이상에 대한 동경과 여정이 음악에 영롱하게 맺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곡은 낭만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슈베르트의 회한이 짙게 깔린 음악이지만 종국에는 쾌활한 악상을 회복하는, 이룰 수 없지만 절망하지 않는 낭만주의자 슈베르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감상의 예 13-17)


 또 한 가지, 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적 업적은 피아노곡에서도 찾아보게 된다. 물론 비교적 후기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19~21번도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지만 오히려 ‘악흥의 순간’이나 두 묵음의 ‘4곡의 즉흥곡’과 같은 소품집에서 슈베르트의 역량이 돋보인다. 리트에서 분출했던 서정적인 악상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장르가 피아노 소품인 것이다. 또한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도 피아노 소나타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장르로 남아있지만 슈만과 쇼팽의 예에서 알 수 있듯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의 음악성이 뛰어난 피아노곡들이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하고 그 선구적인 업적이 슈베르트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감상의 예 13-18)

슈베르트 공원의 기념비


불행한 낭만주의자, 슈베르트


 우리는 슈베르트를 가난했던, 고독한 천재 음악가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옳은 말도 아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물론 본인이 원했다면 갈 수 있었던 교사의 길을 슈베르트는 외면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과 음악 교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베토벤을 언급하면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귀족 계급의 몰락과 함께 귀족들의 후원제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부정기적인 기획 연주회의 오케스트라 단원이나 가정 교사의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정한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의 음악 교사라는 직업은 음악가로서는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슈베르트가 음악가가 되기 위해 교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보다 정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자면 오직 음악 만을 하기 위해서 교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롤 모델인 베토벤을 염두에 둔 생각일지도 모른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에 작곡은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악기의 연주가 음악가의 생계를 책임져 주던 시대에 그다지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없었던 슈베르트의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슈베르트의 수입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600 여곡의 리트가 큰 수입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간혹 들어왔던 오페라의 작곡 의뢰가 간헐적인 수입을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 오페라의 작곡은 선입금을 전제로 작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경제 개념이 없었던 슈베르트는 수입이 생기는 대로 벗들과 함께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한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매독의 감염도 벗들과의 방탕한 생활의 결과였다. 그렇다고 슈베르트의 인생에서 벗들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한 사교 모임인 ‘슈베르티아데’를 통해 그 많은 리트가 작곡되고 벗들과 함께 음악을 시연할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이 이루어졌기에 샘솟듯 리트가 작곡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티아데의 모임에서의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은커녕 음악가로서 자신의 피아노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벗들의 집을 전전하며 생활했던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벗들과의 동성애 감정을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벗들과의 관계가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진실한 우정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실질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에 상관없이 슈베르트는 음악이라는 이상을 위해 살았고, 죽을 때까지 이상을 바라보는 동경의 마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음악학자 마르셀 슈나이더는 슈베르트의 음악에 대하여 “천국을 향한 동경의 울림”이라고 말한다. 슈베르트는 모두가 잃어버린 천국을 동경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슈베르트는 예술가로서 이상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이상 만을 동경했기에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낭만주의자이다.

 그리고 외롭게 혼자 피었다 일찍 져버린 낭만주의의 꽃이었다.

 


 




감상의 예 13-1) 곡의 도입부에서부터 피아노의 분산 화음이 물레가 돌아가는 음형을 묘사하는 한편, 그레트헨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다. 불안한 예감은 물레의 실이 끊어지면서 최고조에 달하고, 이때 피아노의 반주도 순간 멈추면서 불안한 심리를 강조한다.

https://youtu.be/n39D3Djmask


감상의 예 13- 2, 3) 1815년에 작곡된, 괴테의 시에 의한 두 곡의 리트인 ‘마왕’과 ‘들장미’는 상반된 성격의 곡들이다.

 ‘마왕’이 통절 형식으로 작곡된, 성격적 묘사가 뛰어난 곡으로 가수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마왕의 성격을 모두 표현해야한다는 점에서 부르기에 쉽지 않은 곡이다.

 반면 ‘들장미’는 유절 형식으로 작곡된 곡으로 단순한 악상이 민요와 같이 사랑을 받고 있다.

https://youtu.be/b0xJ2elhJ1I

https://youtu.be/aUtf2ZHDUEA


감상의 예 13- 4, 5)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중 제 11곡인 “나의 것!(Mein!)”에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벅찬 기쁨과 고무된 자신감이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연적인 사냥꾼이 등장하고, 결국 실연한 젊은이는 흐르는 시냇물에 몸을 던지는데 오로지 흐르는 시냇물 만이 실연의 아픔에 위로가 된다. 마지막 20번째 곡인 “시냇물의 자장가(Des Baches Wiegenlied)”에는 목숨을 끊는 젊은이의 정서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요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https://youtu.be/gdeoTFiWJY8

https://youtu.be/83GqW_X9gaY


감상의 예 13- 6~10) 

 제1곡인 “밤 인사(Gute Nacht)”는 사랑을 잃고 밤에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을 단조로운 음형을 반복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연상케 한다.

 유명한 제5곡 “보리수(Der Lindenbaum)”에서 나그네는 잠시 방랑을 멈추고, 지난 날에 대한 회상에 잠긴다.

 그러나 지난 날에 대한 달콤한 회상도 잠시, 나그네는 회한에 찬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제6곡 “넘쳐 흐르는 눈물(Wasseflut)”

 제21곡 “숙소(Das Wirthaus)”, 외롭고 희망이 없는 여정 가운데 몸 누일 곳조차 없는 나그네는 공동 묘지에서 지친 심신의 안식을 찾는다. 이 가곡집의 리트 중에서 가장 서정성이 짙은 곡이다.

 이 가곡집의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에서는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구걸을 하는 늙은 악사에게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고 함께 긴 여정을 떠난다. 단조로운 음형의 여운이 남는 짧은 음악이 쓸쓸함과 위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매력적인 곡이다.

https://youtu.be/TwjkuYmE27M

https://youtu.be/v5zhrUdtxPg

https://youtu.be/saURwtRTgD4

https://youtu.be/mBOtMtgVGCA

https://youtu.be/nyDTPuaFCDg




https://youtu.be/jCxdoFQlhqg

https://youtu.be/YiluJ9_D2ug

https://youtu.be/G2K7RVpG98s


감상의 예 13- 14, 15) 슈베르트의 A장조 피아노 5중주곡은 리트 ‘송어’의 선율을 4악장에 주제로 사용하여 변주곡으로 구성했다. 5악장으로 이루어져 디베르티멘토의 성격이 강하다.

 4악장의 주제와 변주가 워낙 아름답지만, 이를 분리하여 나머지 악장 만으로 음악을 구성해도 균형미가 있어 명곡으로 남았을 것이다.

https://youtu.be/KvIwv9njoDw

https://youtu.be/b59IfQkNhvU



감상의 예 13-16)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중 1악장(andante, allegro ma non troppo)

https://youtu.be/Gs0FVs74gT8



감상의 예 13-17)

 슈베르트의 C장조 현악5중주곡 중 2악장(adagio)

https://youtu.be/f7TCuxfEitw



감상의 예 13-18)

 슈베르트의 ‘4곡의 즉흥곡’ D.959 전곡

https://youtu.be/j1rCDLGcV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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