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지치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저녁,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겨 본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아무런 생각 없이 오감으로만 음악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무념무상의 지경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을 들으며 무엇인가를 깨닫거나 얻으려 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진정한 음악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다. 온전히 음악을 자신에게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저 귀를 열어놓고 전해져 오는 음악의 전부를 감각으로 느낄 일이다.
나는 많지 않은 경험을 통해 이처럼 마음을 놓아버리고 음악 자체에 몰입했을 때의 고양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음악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이런 몰입이 쉽지 않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늘어갈수록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는 태도가 자리를 잡아가기 때문이다. 연주회장에 가서도 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음은 그날의 연주를 재단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사실 이렇게 음악을 접하는 자세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비평적인 관점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이러한 음악에의 분석적이고도 비평적인 접근은 순수한 의미로의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음악은 마치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존재하는 첫사랑의 순수했던 마음과도 같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음악에 대한 순수한 몰입은 오늘처럼 상태가 좋지 않아 사람이 좀 멍한 상태일 때, 그러니까 우리가 꿈을 꾸듯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재클린 뒤 프레가 연주하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 LP를 턴테이블에 올린다. 이 곡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명연이라는 연주다. 이상하게도 이 곡은 유독 여성 첼리스트의 연주에 뛰어난 것이 많다. 뒤 프레의 연주는 물론, 1920년에 이 곡의 첫 음반을 남긴 베아트리체 해리슨이 그렇고, 요즘 성가가 높은 솔 가베타가 또한 그렇다. 이런 생각도 여기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이 곡과 여성 연주가의 감성 연관성을 생각한다거나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28살에 음악가의 길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여성 첼리스트의 감성 등 음악에 음악 외적인 부분을 대입하기 시작하면 음악에의 순수한 몰입은 불가능해진다.
그냥 서두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훅하고 들어오는 압도적인 첼로의 울림에 마음을 내려놓고 오감을 열어 음악에 집중해 본다.
어느 듯 음악이 끝나고 내내 가라앉았던 마음에 새롭게 의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제 분위기를 바꾸어 역시 엘가의 사랑스러운 소품 '사랑의 인사' CD를 플레이어에 올리고 듣는다.
문득 지금은 내 곁을 떠나간 얼굴들을 떠올린다. 떠나가신 부모님과 작은 형님, 그 사랑이었던 이름들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한때는 슬픔이었던 이별의 순간도 사랑으로 남아 잊어본 적이 없는 이름을 하필이면 내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떠올린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을 듯싶다. 이제는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함께 살아갈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떠나간 이름이 생과 사로 갈린 경우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함께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그중에는 지난 시간 속에서 의미로 남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이름이 있다. 물론 첫사랑도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랑이었던 이름 외에도 미처 몰랐던 사랑의 이름이 불러줄 대상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밤에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출하여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