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는 상실의 기억

-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

by 밤과 꿈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짧은 문장 안에서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젊음의 모습이 느껴진다.

소설은 그 시작과 마지막에서 승부가 난다고 한다. 그만큼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중요하고 이 첫 문장을 위해 소설가들은 고심을 거듭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이 소설의 첫 문장만큼 소설의 주제를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설혹 이 소설의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 이 문장을 접했다고 하더라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 문장이다. 그 신선한 유혹에 집중해서 소설을 읽게 만든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추구해온 ‘젊은 날의 사랑과 상실’이라는 주제의 범주에 속한 소설이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린 소설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후 하루키 열풍을 일으키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을 했다.

도대체 하루키 열풍의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국내의 유명 작가가 표절했다는 하루키의 감각적인 문장도 그 이유이겠지만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불안한 영혼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한다. 나오코는 고향의 고등학교 친구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다. 기즈키는 이유를 남기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자살을 택하고 이에 나오코는 물론 와타나베도 큰 충격을 받고……

고향에서의 아픈 추억을 뒤로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떠나온 도쿄. 이곳에서 와타나베는 다시 만난 나오코에게 공통의 아픔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이를 넘어선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즈키의 자살로 인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나오코는 요양원에 입원하고, 와타나베와의 사랑으로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지만 결국 기즈키와 마찬가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와타나베 또한 자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의 미도리를 만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말하자면 나오코에게 있어서 상실의 대상이 기즈키였다면, 와타나베에게는 나오코가 상실의 대상인 셈이다.

나오코는 끝내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고, 와타나베는 서른일곱 살이 되어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했을까?

“행복해야 해.”

나오코의 요양원 동료 레이코와 작별하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자신과 나오코의 몫까지 행복해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하지만 그 말은 독자가 느끼기에도 공허하고 행복이란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실제로 소설의 마지막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레이코가 와타나베에게 하는 말, 즉 “날 잊지 마.”라는 말이다.

“난 벌써 끝나 버린 인간이야. 네 눈앞에 있는 건 옛날의 나를 비춘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아.”라는 레이코의 말마따나 정신병으로 오래전에 일상을 상실,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언제 정신병이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레이코는 자신의 존재가 망각될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레이코 만의 두려움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아닐까?

이 소설이 와타나베의 회상으로 구성되었다는 면에서 와타나베는 젊은 날의 상실, 그 아픈 기억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당연지사. 더하여 그때의 상실이 가져온 회한을 다른 무엇으로도 채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인생의 한 시기에 경험한 상실은 시간이 흐른다고 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실의 빈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채우지 못하는 상실로 해서 마음에 아프게 각인되는 시기일 것이다. 특히 인생에서 상실을 경험한 시기가 20대 청춘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면 그 상실은 나이에 맞도록 격렬하게 스러지고 아픔 또한 간단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 아픔은 평생을 함께 한다. 우리는 모두 통과의례처럼 불안정한 20대를 보낸다.

와타나베의 상실감은 나오코와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원인이다. 상실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며, 충족되지 못한 현실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20대도 와타나베가 건너온 상실의 시기와 다를 바가 없다. 돌이켜보면 내가 건너온 1980년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었으며, 이 좌절의 시기를 줄곧 사회와 갈등하면서 보냈다. 이때는 여자와의 사랑도 강박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결코 안식처가 되지 못했었고, 영혼은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 당시 내가 잃어버린 것은 한 시대였기에 여태 회복되지 못할 견고한 상실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린 하루키, 아니 와타나베의 인식에 깊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소설을 이끌고 있는 힘을 느끼게 된다. 상실의 20대를 건너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가 비구름이 두껍게 깔린 함부르크 공항 상공에서 한, 아직도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떠돌며 하는 다음과 같은 인식 말이다.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