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는 사자꿈을 꾸지 않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

by 밤과 꿈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중에서


헤밍웨이라는 작가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행동주의 작가라는 명칭이다. 그만큼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소설들은 참전 군인과 종군 기자로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었다. 주재 기자로 머문 파리에서의 경험이 소설의 바탕이 된 ‘해는 다시 떠오른다’(1926)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의 경험으로 쓴 ‘무기여 잘 있거라’(1929), 스페인 내전의 종군 기자로서 경험한 체험이 바탕이 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에서 헤밍웨이는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생명력이 넘치는 문장을 구현, 문학성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겸비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태를 반영한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대표작을 하나만 고르라면 아마도 압도적인 선택을 받을 소설이 ‘노인과 바다’일 것이다. ‘노인과 바다’야말로 헤밍웨이라는 작가의 인생관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다른 대표작들이 대부분 삶의 어느 시기에 역사적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노인과 바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물론 쿠바를 특히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쿠바에 머물며 어부들과 함께 직접 고기잡이를 한 경험이 있었지만, 소설의 배경에 구체적인 사건이 개입된 것으로 이해할 정도가 아니라서 소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평생 체득한 인생관을 산티아고라는 전형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산티아고는 쿠바 근해를 흐르는 멕시코만류에 조각배를 띄우고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다.

그는 오랜 어부의 삶이 가져다준 깊은 흉터가 양손 군데군데에 나 있었다. ‘이 중에 새로 생긴 흉터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물고기의 씨가 말라 버린 사막의 침식지형처럼 오래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소설의 인물 묘사에서 산티아고가 늙고 병든, 한물간 어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가족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외로운 독거노인인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자신을 따르며 어부로서 자신을 존경하는 소년이 있다. 한창때에는 함께 고기잡이를 하면서 노인을 돕던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배를 타고 있다. 고기잡이를 보조하면서 잡은 생선을 얻을 수 있었기에 소년의 부모가 소년이 노인의 배를 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소년은 외로운 노인을 가까이에서 보살피고 있다. 노인이 혼자 사는 집에 불을 지피기고 하고 먹을 것을 챙기기도 한다. 그리고 노인과 소년은 ‘꾸며낸 대화를 매일 주고받았다.’ 실체가 없는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물론 노인의 깊은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지만 노인과 소년의 유대감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인과 물고기(아마도 청새치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대부분 ‘물고기’로 불린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 사투의 순간순간마다 노인은 소년이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아이가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나를 도와주고 이 근사한 장면도 구경할 수 있을 테고 말이야’라고.

소설 ‘노인과 바다’는 구성의 대부분이 늙은 어부 산티아고와 물고기 사이에 벌어지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도 작가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배경 묘사와 노인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심리 묘사가 이 소설을 이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소년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늙고 병들어 고기잡이 일도 수월치 않은 노인의 무기력함은 ‘노인은 폭풍우나 여자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큰 사건이나 큰 물고기 꿈도, 싸움이나 힘겨루기에 관한 꿈도, 죽은 아내 꿈도 꾸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저런 장소나 해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자들 꿈만 꾸었다‘라는 인물 묘사나, ‘다만 운이 더는 없는 것이지. 하지만 누가 알아?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을지도‘라는 노인의 생각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노인에게 있어 소년의 존재는 노인에게는 우호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반면, 물고기는 노인과 적대적인 긴장 관계에 있지만 노인과 물고기 사이의 외로운 사투를 통해 동병상련(?)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물고기야, 난 네가 좋아. 또 너를 대단히 존경하게 되었어. 그렇지만 오늘 안으로 반드시 너를 죽이고 말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노인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큰 물고기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물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라는 심리 묘사에서 노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지만 적대적 긴장을 누그러뜨릴 정도는 아니다.

결국 노인은 물고기를 죽이지만 물고기를 빼앗으려는 상어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가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라고 전의를 불태워 보지만 계속되는 상어 떼의 약탈에 물고기의 살을 모두 잃고 ‘노인은 자신이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은 일찌감치 자신의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일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 법이야.’

혹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네는 지쳤군, 늙은이’라는 쓸쓸한 독백과 같이.


헤밍웨이가 소설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이후 작가로서의 경력은 정점을 찍을 수 있었다. 1953년에 이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헤밍웨이는 건강 상의 문제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이후로 더욱 건강이 악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등의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다 1961년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헤밍웨이의 사인에 대해서는 유서를 따로 남기지도 않았고 사망 당시의 목격자도 없어 정확한 사인을 특정하지는 못하지만, 정황상 엽총에 의한 자살로 추정할 따름이다.

비록 추정일지라도 자살은 행동주의 작가 헤밍웨이에게 썩 어울리는 죽음이지 싶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라는 산티아고의 말처럼 헤밍웨이는 자신에게 덮친 병마에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삶을 단번에 끝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때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자꿈’이다. 노인이 그만두었던 고기잡이를 다시 나선 것이 사자꿈을 꾸고 난 후였다. 그렇다면 노인이 꾸는 사자꿈은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자를 좋아한 노인은 평소에도 사자꿈을 자주 꾸었다.

‘노인은 폭풍우나 여자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저런 장소나 해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자들 꿈난 꾸었다’라는 심리 묘사로 보아 사자꿈은 노쇠한 노인의 ‘무기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어부로서 최고의 성가를 올리던 시절에 대한 회고적 심리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회고적 심리라는 점에서 사자꿈은 노인의 ‘고독’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노인은 사자꿈을 꾸고 있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물고기와의 힘든 사투를 끝내었으나 상어에게 물고기를 잃고 허무만 남은 노인은 꿈속에서라도 사자의 기품을 닮은 자부심을 붙들고 싶으리라. 따라서 사지꿈은 노인의 욕망과 고독이면서, 동시에 되새김하듯 끝까지 잃고 싶지 않은 자부심 같은 것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자신이 창조한 소설 속 전형인 산티아고와 같이 과거를 회고하면서 삶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파괴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 노인은 사자꿈을 꾸고 있었지만, 헤밍웨이는 사자꿈을 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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