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지영의 단편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
그들은 우리들의 이십 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내가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하고 중얼거리며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 공지영의 단편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 중에서
1980년대를 지나온 젊음, 특히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큰 상처로 기록된 5. 18을 막 지난, 가장 암울한 시기인 1980년대의 초반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음의 시간을 보낸 사람 중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에 무관하게 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평생 치유되지 못할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장황하게 들리겠지만 그만큼 1980년대를 말할 때 내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사회 현실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던 학생들을 통칭하여 운동권이라고 부르지만, 그 용어가 지닌 단순화로는 그들이 가진 이상과 고뇌, 그리고 시대의 부침에 따른 아픔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이는 그 시절을 함께 대학을 다녔던 사람일지라도 이른바 운동권 바깥에 있었다면 결코 알지 못할 내용이다.
물론 학생운동은 시대적으로 다양한 층위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에 대항하여 1980년의 봄, 서울역에 집결한 수많은 대학생들은 신군부 세력의 집권 야욕을 분쇄한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이 땅에서 유신 독재의 망령을 떨쳐내고,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탄생을 목전에 두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5. 18의 야만적인 비극으로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또한 1987년의 이른바 ‘6월 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으로 대표되는, 신군부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했을 때 이에 대한 대학생을 비롯한 국민의 저항의 결과 ‘6. 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 시대에 항쟁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후 운동권은 이념 지향에 따라 분열,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을 거쳐 정치세력화한다. 그 결과 학생운동은 순수성을 상실, 그 영향력이 약화하고 구성원 일부는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반면, 81학번인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 초는 잠깐 머물렀던 1980년 봄의 희망도, 1987년의 기쁨도 생각할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졸업 정원제’라는 실효성 없는 제도가 대학생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등장했고, 운동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젊음을 일깨울 희망이나 분노의 대상도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운동의 방향을 암중모색하던 때였다. 이 와중에서 겪는 번민과 좌절은 오롯이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운동권 학생들의 몫이었다.
공지영의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대학 시절 운동권의 일원이었고, 지금은 여성지의 기자인 ‘나’를 화자로 해서 1980년대(아마도 6월 항쟁을 경험한 1980년대 후반의 세대일 것이다) 운동권의 모습과 대학 졸업 이후에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나 살아가는, 자신을 포함한 운동권 출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라는 소설의 주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 이민자라는 인물과 권오규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민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가로서 어느 날 자신의 예술적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뒤로하고 인도에서 고행을 실천하는 수행자로 살다 귀국한, 역사와 사회, 그리고 현실 문제에 초연한 삶을 살아온 중년의 여성이다.
그리고 권오규는 1970년대에 시국사건으로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로 무기수가 되었다 반백에 가까운 나이에 출옥, 옥중에서 쓴 편지를 책으로 출간한 장기수다.
1980년대를 살았던 ‘나’는 대학 재학 당시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외삼촌이 사장으로 있는 여성지에 기자로 있다. 또한 대학 때 운동권 선배였던 강 선배도 수배와 구속이 점철된 삶과는 전혀 다르게 아버지가 경영하던 버스 회사를 물려받았다. ‘나‘는 과거 운동권이었으나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나 있었고, 지금도 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의를 멈추지 않는다.
‘한 친구는 자취방에서 목을 매었고 또 한 후배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 한 친구는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아파트 십 층에서 뛰어내렸고 또한 선배는 새벽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달려오는 택시에 치여 그대로 죽어버리기도 했다‘라고 이 세상에 없는 동료들을 떠올리다가도 ’살아있었으면…… 그들은 모두 무엇을 할까‘라는 자문을 통해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십 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나아가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 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 버렸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여성지 ‘여성생활’의 기자인 ‘나’는 기획 기사의 취재를 위해 무기수 권오규를 만난다. 그러나 그에게서 기사가 될 어떤 생각의 단서를 얻지 못한다. 유신정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다는 혐의에 공산혁명을 계획했다는 상투적이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혐의로 오랜 세월 자기 인생을 감옥에 방기해야 했던 권오규라는 사람. ‘나’의 기억처럼 ‘몇십 명의 비밀결사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70년대적 순진함’ 일뿐인 권오규, 그로 해서 ‘박 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전두환 씨가 백담사로 간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문민정부시대가 온 것도 아니었다.‘ 팔십 년대에 이십 대를 보낸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권오규는 어떤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6월 항쟁’이라는 격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옮으면 승리한다는, 아아, 너무도 단순했지만 너무도 굳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공장에 위장 취업, 학생운동을 노동운동으로 이어가던 후배 윤석은 일당 칠백 원을 더 받기 위한 임금 투쟁으로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는 죽고 같이 있던 사장은 살았다. 그러고도 일당은 오르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식당에서 일을 한다. ‘나’는 의식 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여성지의 기자로 살고 있고, 민주 투사였던 강 선배는 아버지가 물려준 버스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다.
그 시대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는 민주 열사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박종철을 고문한 수사관들이 그를 죽일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한열 또한 시위의 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을 의도도, 이유도 없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연과 필연이 혼재되어 이루어지는 법이다. 두 사람의 죽음은 우연이었지만, 이를 기폭제로 해서 우리 사회를 민주화로 이끈, 축적된 역사적 동인은 필연이었다. 이것은 국민(민중이라는, 이제는 상투적으로까지 들리는 용어는 쓰지 않겠다) 모두의 힘이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대학생으로 살았던 80년대가 민주 항쟁으로 뜨겁던 격정의 시대였다면, 내가 대학생으로 살았던 80년대 초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운동권 전체의 향방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때였다. 그리고 거듭된 고민의 결과 개인이 역사적 존재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스스로가 역사의 동인이 될 때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한 생각, 즉 ‘우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을 배웠던 사람들이었다’라는 생각은 시대적 편차에 상관없는 운동권의 가치이지만, 그 시대를 함께 살다 고꾸라진 사람이나 가까스로 그 시대를 빠져나온 사람, 그중에서 신념대로 살다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과 끝까지 신념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사람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지영은 이 소설에서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한다. 이민자를 기사의 주인공으로 택하고자 하는 회사의 방침과는 달리 화자인 ‘나’가 권오규를 선택한 이유로 감옥에서 젊음을 바친 무기수 권오규가 가진 ‘인간에 대한 예의’에 대하여.
이것은 권오규뿐만 아니라 각자의 시대에서 사회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 죽었거나 살아서 아픔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위로의 말이 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인간에 대한, 그리고 살았던 시대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 무엇보다도 배반의 시대에 타자를 생각할 수 있는 품격으로 스스로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과 마음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