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의 베토벤은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본을 떠나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왕국의 수도 빈에 정착하게 됩니다.이는 빈의 주도적인 음악 애호가였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 판 슈비텐 남작은 베토벤의 빈 정착 초기의 후원자로서 베토벤에게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시 빈 음악계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판 슈비텐 남작은 직업 외교관으로서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에는 베를린에서의 7년이란 기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를린에서의 7년 동안 판 슈비텐 남작은 프러시아 왕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만하임 악파나 베를린 악파는 감정 과다 양식에 의한 보다 진지하고 위대한 관념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면 빈 고전파 음악의 확립 이전의 비엔나 악파는 보다 즐겁고 가벼운 궁정 취향의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에 머무는 7년간 판 슈비텐 남작은 천재와 창조의 개념에 관한 미학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접하고 이와 같은 음악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빈 음악계에 전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빈으로 돌아간 판 슈비텐 남작은 프로이센 왕국의 관할이었던 본에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베토벤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을 것이고 베토벤을 빈으로 초청, 10년간 그를 후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빈 음악계에 있어서의 판 슈비텐 남작의 영향력은 베토벤의 빈 정착을 수월하게 해 오래지 않아 베토벤의 음악은 빈의 음악 흐름에 있어 대세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음악 소비의 변화와 후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780년에서 1790년에 이르는 시기에 판 슈비텐 남작은 빈에 진지한 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 소비의 경향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지만 유독 베토벤에 이르러 그 결실을 보게 되는 데에는 음악 소비에 관한 사회적 변화가 동반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몽 군주들은 궁정 내에 궁정악단을 육성, 취미로서 음악을 장려하고 소비했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 또한 왕가를 따라 크고 작은 궁정악단을 보유하고 자신들의 특권 신분으로서 지녀야 할 교양의 공급처로서 이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이든도 음악 애호가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악단 악장으로 봉직했었습니다. 이 시절에 음악가의 신분은 귀족에게 예속된 하인과 같은 것으로 낮은 신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 또한 오스트리아 왕가의 궁정악단 악장 자리를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요절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음악가가 왕족이나 귀족에게 예속되어 궁정악단원이 된다는 것은 독립된 신분은 아닐지라도 경제적인 안정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770년 경에 이르러 왕궁의 궁정악단이 해체되었고, 왕궁을 따라 궁정악단을 유지하던 귀족들 또한 궁정악단 운영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덩달아 궁정악단을 해체하게 됩니다.
이에 궁정악단을 대신하여 1775년 경에 음악 소비의 방법으로 생겨난 것이 딜레탕트(애호가) 포럼이라는 소비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귀족의 살롱에서 이루어지는 포럼 형태의 음악회를 벗어나 대형 연주회장에서 이루어지는 콘서트로 음악 소비 형태의 변모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이 빈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을 때가 바로 귀족의 살롱에서 이루어지는 딜레탕트 포럼이 이미 활성화된 시기로서 이때에 이르러 음악가들은 귀족들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하게 됩니다.
베토벤을 후원했던 귀족들은 초기의 판 슈비텐 남작을 비롯하여 라주모프스키 백작, 로브코비츠 공작, 발트슈타인 백작, 루돌프 대공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베토벤은 아무런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베토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악성으로 칭송받는 것은 1790년대와 1800년대 초에 빈 귀족들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베토벤을 일컬어 음악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음악가로 언급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지위는 슈베르트에게 보다 더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이르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 귀족들의 후원은 사라지고(그래서 베토벤의 말년이 곤궁했던 것입니다), 프리랜서 음악가가 등장하는데 그때가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재능의 탄생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 빈의 음악 애호가들은 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시골이랄 수 있는 본에서 단지 가능성이 많은 한 젊은 음악가를 빈으로 이끌어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산층의 경제력과 신분 상승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는 전반적인 중산층의 사회적 약진이 있었던 데다가 경제력이 좋아진 중산층의 일부는 작위를 받고 새로운 귀족으로 편입되는 사회적 계층 변화가 빈번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신흥 귀족은 기존의 귀족들이 향유하던 모든 것을 누리고자 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기층 귀족들은 신흥 귀족과는 차별되는 영역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음악에 있어서 '질적인 차별화'와 '위대한' 음악에 집착, 뛰어난 거장을 찾아냄으로 해서 그들이 보다 고급 취향을 가진 '진정한' 귀족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들의 허영이 어떤 차를 타느냐를 가지고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고자 하는 오늘의 우리가 가진 허영심보다는 그래도 좀 더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이 베토벤의 재능과 위대함을 폄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베토벤의 활동 당시에 시대를 앞서 갔던 그의 음악과 깊은 정신성이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베토벤이 가졌던 재능과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부분이 일치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