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의 추억

by 밤과 꿈

한동안 태광이나 롯데 파이오니아, 인켈과 같은 국내 기업에서 제작한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이 많이 팔렸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등장,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도 꾸준히 팔렸던 국산 오디오의 약진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디오라면 1960년대에 제작되었던 국산 별표 전축이나 독수리표 전축이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장전축이라고 부르는 이들 콘솔형 오디오는 가구를 연상케 하는 외양으로 무슨 부의 상징처럼 집안을 장식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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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장전축의 자리를 제법 덩치가 있는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이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인데, 1980년대 초에는 이들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이 소형화되기 이전인지라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입장에서는 개인 소유의 오디오를 가진다는 것이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악에의 갈증으로 lp판을 사서는 단골 음악다방에서 듣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자기 오디오 시스템 없이 그렇게 음반을 사서 모았는지 그 열정이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싶다.

지금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커피숍을 찾기가 힘들지만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종로 YMCA 인근의 글로리아 다방과 종로서적 뒤편의 아그레망과 소노라마에서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고, 광화문의 라 뮤즈, 신촌역 인근의 콜롬비아, 이대 정문에 있었던 아울로스와 혜화동의 사라방드, 회기동의 심포니와 비탈리, 그리고 이문동의 작품 80, 안국역의 카페 브람스와 경복궁 옆의 예방 등이 클래식 음악이 흘렀던 곳으로 기억된다.

이들 커피숍은 거의 사라졌지만 안국역 대로변 낡은 건물 2층에 자리한 카페 브람스는 옛 모습 그대로 있어 반가움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은 여건이 좋아 찾아들을 수 없는 음악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좁은 클래식 음반 시장 탓으로 음반의 제작과 유통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다. 이른바 라이선스 음반으로 구해 들을 수 없는 음반은 미군 px나 보따리 상인을 통해 유입된 외국판을 회현동의 음반 가게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아 항상 명연주에 대한 갈증이 가시지 않았었다.

그럴 때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 전문 음악감상실이었다. 당시에 서울에는 종로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과 명동의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이 있어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자주 찾았던 곳은 명동에 있었던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이었다. 그것은 필하모니의 의자가 지금의 극장식으로 좀 더 안락해서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론 음악을 듣다 잠이 들어도 딴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의자에 파묻히는 구조가 좋았다. 그리고 명동이라는 곳이 주는 이름값도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의 명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명동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하는 멋스러운 여자들 구경하는 재미도 한몫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면 음료 한 잔이 제공되고 온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무료한 공휴일 오후에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던 기억이 있다.

입장권의 가격이 얼마였는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입장권에 신청곡을 신청하면 대머리가 시원했던 dj 아저씨가 흑판에 감상곡을 분필로 능숙하게 써나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이 1970년대 생겼으니 1951년 전쟁통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 비해 역사가 일천하여 많은 문인과 예술가와 관련한 일화는 르네상스에 비해 빈약하지만 군사 정권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에서 대학교를 다녔던 나에게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 피난처가 되었었고, 그때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 중에는 훗날 문인과 예술가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그들에게도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은 답답했던 그 시절에 안식처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철 이른 추위와 함께 성큼 다가서는 겨울에 40여 년 전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을 채웠던 음악의 온기와 평안을 떠올려보게 된다. 그리운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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