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두 번째 쓰는 단편소설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영아기와 유아기의 일부를 보냈던 한 한옥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내가 몇 살까지 그 집에서 살았는지는 뚜렷한 기억이 없다. 워낙 어린 나이인지라 그 집에서의 기억이 짙은 안개가 머리에 드리운 것처럼 흐릿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억 중에서도 그 집을 벗어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때의 나에게는 그 집에서 보고 듣는 전부가 곧 접촉 가능한 세상의 모습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한 이후에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취학 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 말하는 한옥에서의 기억은 내 나이 세 살에서 네 살, 길게 잡아도 다섯 살을 넘기지 않는 시절의 기억일 것이다. 이웃에 대한 기억은커녕 우리 가족에 대한 기억도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세 살 터울의 작은 형에 대한 기억 외에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만큼 제대로 기억이 형성되지 못할 시기을 그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 만이 어린 마음에 각인되었으리라.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옥의 구조와 집안의 풍경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신통한 일이다.
어린 날의 한옥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앞마당에 조촐하게 꾸며진 연못이었다. 비록 작은 연못이었지만 보기에 좋은 암석으로 둘레를 쌓고 아담한 나무를 바위틈에 식재하고 군데군데에 화분을 놓아 꾸민, 아름다운 연못이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연못을 꾸민 암석은 아버지께서 남해의 금산에서 직접 채취해 오신 것이란다. 지금이라면 불법으로 가능하지 않을 일이지만 그때는 크게 단속의 대상이 아니었나 보다.
또한 그 집에는 응접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천으로 된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응접실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할 목적으로 꾸민 공간이었지만, 공무원이라는 아버지의 직업으로 보아 직장이 아닌 집으로 손님이라고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을 터, 응접실은 아버지의 호사 취향으로 마련된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응접실이 본래의 기능을 못하다 보니 그곳은 작은 형과 나의 훌륭한 놀이 공간이 되었다. 큰누나가 나와 작은 형을 위해 고무찰흙으로 빚은 개나 고양이, 돼지 등 동물의 형상을 소파 테이블에 늘어놓고서는 눈을 떼지 못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찰흙의 유분이 휘발, 동물의 형상이 갈라지고 뒤틀려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본채의 뒤쪽으로는 내가 좋아했던 공간으로 나를 바깥과 단절시킨 담벼락이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담벼락이었지만, 담벼락 너머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이곳을 좋아했다. 담벼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훗날 내가 다니게 될 국민학교가 있어 담벼락을 넘어 들려오는 형과 누나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속을 가득 채웠다. 어린 나에게는 담벼락이 나를 바깥으로부터 차단시키는 세상의 끝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의 끝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나에게 호기심을 넘어서 하나의 설렘이었다. 그래도 담벼락이 조금 허물어져 생긴 틈을 통해 그만큼의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바깥세상은 온통 푸르렀다. 지금 생각할 때 아마도 담벼락은 텃밭이나 잡초가 무성한 공터와 맞닿아 있었지 싶다.
앞서 사람과의 접촉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뚜렷하게 각인된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그 시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나환자와 상이군인의 구걸 행각이었다. 나환자는 얼굴이야 수건으로 가려 뭉그러져 주저앉은 콧등이나 눈썹이 빠져 어색한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손을 감싼 붕대 사이로 얼핏 보이는, 뭉툭하게 떨어져 나간 손가락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환자들이 어린이를 납치, 간지럼을 태워 죽인 후 간을 꺼내 약으로 쓴다는, 말도 안 되는 풍문을 철석같이 믿고 오랫동안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조금 더 자라 다른 집에서 살 때 윗동네에 살던 아줌마 한 사람이 덜컥하고 나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아랫동네에까지 퍼졌던 일이 있었다. 더하여 며칠 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나환자들이 찾아와 아줌마를 데리고 갔다는 소문까지도.
속되게 문둥이라고 불리던 나환자에 대한 공포스러운 조우 못지않았던 것이 상이군인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대 중반이었던 당시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시절로 그만큼 전쟁터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은 상이군인들의 구걸 행각은 흔하게 보는 광경이었다. 어쩌다 문단속을 잘못했을 때 떡하니 마당으로 들어선 나환자나 상이군인을 볼 수 있었다. 나환자들이 그들의 환부를 조금이라도 가리고자 했다면 상이군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환부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낡은 군복의 한 번 접은 소매 사이로 차갑게 반짝이는 금속 갈고리는 분명 혐오스러운 물건이었지만 어린 내 눈에는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있는 쇠붙이가 그저 호기심만 자극했을 따름이었다. 설마 잘린 손목에 손 대신에 갈고리가 자리 잡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저 군복 깊숙이에 감춘 손으로 갈고리를 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환자에 비해 상이군인을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상이군인이 나환자처럼 내 간을 빼앗아 갈 일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