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두 번째 쓰는 단편소설
일제강점기와 혼란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피비린내 진동하는 한국전쟁까지 모두 겪은 부모님 세대의 곤란이야 흔하게 듣는 이야기이지만, 해방 후 경찰에 투신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세무 공무원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행정 공무원으로 교육계에 정착, 정년까지 채웠으니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안정된 직장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경찰과 세무직은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던 직장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체질적으로 권력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가족들의 강권으로 일본 군복을 입고(그 시대에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징병이 되어 전선으로 나가면 그 가족들은 일본의 수탈에서도 일종의 혜택을 받았던 모양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었다. 주로 버마(지금의 미얀마) 전선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아버지는 처음 전선으로 향하던 수송선이 어뢰를 맞고 침몰, 구조될 때까지 24시간 동안 바다에 떠다녔다던가, 참호에서 잠시 벗어나 소변을 누는 사이 참호에 포탄이 떨어졌다던가, 말의 목을 관통하고 날아온 총탄이 아버지의 가슴을 뚫었지만 말 때문에 추력을 많이 상실, 심장에 미치지 못해 목숨을 건졌다(아버지는 기마병이었고, 가슴에 총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이했으니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셈이었다. 국군 창설 때 아버지가 원한다면 초급 장교로서 임관이 가능했지만 군대라면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차선으로 선택한 직업이 경찰관이었으리라.
당시에 힘깨나 쓰는 직장을 마다한 것과 같이 아버지께서는 공무원에게는 과분해 보일 수도 있는 온실이 있는 집을 마련하고 가꾸면서 지켜나갔다면 아버지의 삶이 좀 더 평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아버지의 평생에 짐이 되었다.
경찰에서부터 평생을 공직 생활을 하신 아버지께서 단 한 번 사업에 투자를 하신 적이 있었다. 당신께서 교육계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관내 학교에 교육용 제도 용품을 납품하는 사업이 전망이 있어 보였던지 이에 덜컥 투자를 하신 것이다. 아마도 잇속에 어두운 아버지에게 들어온 솔깃한 제안에 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업이 당신께서 파악이 가능한 교육 현장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투자를 했을 것이다. 이후의 사정을 어렸던 내가 알 수도 없었고, 커서도 좋지 않았던 기억을 가족 모두가 되새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당시의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투자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버지께서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것은 물론, 잠적한 사업자를 대신해 부실 경영으로 인한 부채까지 껴안게 되셨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된다. 이를 보면서 남에게 사기를 당하는 패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사기를 당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자 하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믿게 된다면 사기를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기를 당하는 가장 큰 요소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있다. 스스로의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닫는 사실이 있다. 세상에는 뜻되로 이루어지는 일보다는 뜻과 같이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그렇게 무수한 좌절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세상에 길이 든다. 순응이라는 생존법을 터득하고 잘들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무수한 상처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날마다 아프지만 제대로 아파할 수도 없이 살아가는 것 말이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께서 사신 삶이 그랬다. 그때의 오판이 아버지의 삶에는 치명타였음이 분명했다. 이후로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신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빚 때문에 아름다운 집을 정리하고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남은 부채를 깨끗하게 청산한 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으니 그 긴 시간 동안 아버지의 속은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 갔을까. 그런 와중에서도 오 남매 모두에게 대학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셨으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 형님과 큰누님이 동시에 대학생이었을 때 누님이 사 년 장학생으로 지방대학교의 약대를 선택했기에 가장 힘든 순간을 잘 넘기기도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분명 아버지의 아픔이 있었지만 오 남매를 키우느라 자신의 아픔조차 제대로 아파할 수 없었던 시간의 축적. 그것은 우리 부모 세대의 공통된 삶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