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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이 있는 한옥(韓屋)-6

- 내가 두 번째 쓰는 단편소설

by 밤과 꿈



작은 형은 내가 음대 음악감상실에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6시에 음대 음악감상실을 빌려 음악을 감상한다는 사실을 말한 적도 없었다. 내가 그날 감상곡인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삼중주곡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를 해설하고 있던 중이었다. 무대에서 해설을 하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겹쳐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일요일이었다. 고향을 다녀온 작은 형이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만간에 아버지한테 다녀와야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법시험을 합격한 후 연수원을 다니고 있던 작은 형이 주말에 고향을 다녀왔었다. 일요일 저녁 작은 형이 고향을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맥주를 청해 드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발병 이후에 술이라고는 입에 대신 적이 없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워낙 진지하게 말씀을 하셔서 맥주를 사 와서는 잔을 채워 드렸단다.

“내가 삼 년을 술 담배를 끊고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 막내 빨리 다녀가라고 해라.“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는 당부의 말을 작은 형에게 하고서는 작은 형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아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는 것이다. 그때가 오월 중순 경으로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무더운 여름이 되기 전에 고달픈 삶을 끝내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그것이 아버지 자신은 물론 삼 년 동안 아버지의 곁에서 간병을 해 오신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던 사월 초 아버지께서는 서울의 한 방사선 전문병원에 입원하셨었다. 병원에 입원하시던 날이 마침 아버지의 생신이어서 모든 가족이 생신상을 차려드리지는 못하지만 병실에서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마지막이 될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제 시간을 맞추지 못해 다른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리지 못했다. 딱히 바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이 더디게 움직이고 있었을 뿐, 쇠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객지에서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뵙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나는 뒤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사실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서는 자주 고향을 다녀온 작은 형을 통해 듣고 있었던 터, 아버지의 병세를 어림짐작으로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병실에서 대한 아버지의 모습은 짐작보다 많이 수척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링거를 달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슬펐다. 그저 내 눈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의 여생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진단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시기 전날, 나는 병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잤다.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에 온돌방을 독으로 쓰고 있었기에 세 사람이 잠을 청하기에 불편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먼저 자고 가겠다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약간이라도 병세가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을 서울행이 보람도 없이 끝나는 마지막 밤을 두 분이 쓸쓸하게 지새우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을 부모님과 보내고 나는 중간고사를 핑계로 아침나절에 병원문을 나섰다. 아마도 내 마음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병원문까지 나와 오래 나를 배웅하시던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도 곧 내려가겠노라는 작은 형과 헤어져 나는 서울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급히 고향으로 향했다. 임종을 지키기 위해 가는 길인 만큼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슬프거나 황망함보다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사월에, 아버지께서 실망감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가신 후 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도 늦어도 그때부터는 마음을 정리하고 생의 의지를 거두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랬기에 조금 생을 연장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여름을 앞두고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이 아닐까.

아침 9시 고향 집에 이르러 뵌 아버지의 모습으로는 지난밤에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셨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육신을 공격하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혀를 깨물었는지 입 속이 피범벅인 데다가 혀가 목 깊숙이로 말려 들어간 채 아버지께서는 생명의 마지막 숨결을 가까스로 몰아쉬고 있음을 쪼그라든 몸의 경미한 움직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요즘이야 병원에서 모르핀 투여로 암환자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생존 가능성이 없는 말기 암환자는 의료 시설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모든 통증을 감수하면서 임종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시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아버지의 얼굴 가까이에서 “아무 걱정하시지 말고 편안히 가세요”라는 말밖에는. 지금 생각하면 그 말 밖에는 아버지에게 할 말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아무리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들이라고 해도 보다 다정다감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와 같이 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에게는 어머니께서 뇌경색으로 투병하는 칠 년 동안 “사랑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도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이었고, 어머니께서도 내 말에 그저 웃고 계시던 평소와는 달리 눈을 맞추고서는 “사랑해요”라고 화답을 해 주셨다. 이에 반해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맞이한 아버지와의 성급한 이별은 많은 아쉬움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고 모든 가족이 고향 집에 모여 앉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부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 방학이 아니면 고향에 내려올 일도, 그래서 성장을 해서 부모님과 생활을 같이 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께서 떠나간 빈자리의 허전함을 그토록 강하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생전에 미리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두신 유언을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자식 모두에게 남긴 말씀이었는데 나에게 남긴 말씀은 “막내가 불쌍하다. 내 얼굴을 오래 못 봐서”라는 말씀이었다. 솔직히 내가 나이가 들어 이별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씀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별의 아픔이라는 것이 더 이상은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실감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주는 공포와 상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남긴 유언은 자식 중에서도 가장 늦게 태어나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의 토로라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지만 이 글에 픽션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뒤이어 현재시제로 아버지의 꿈과 나의 꿈에 대한 상관성이랄까,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삶이랄까, 아직은 확정되지 않은 내용의 글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허구가 많이 가미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쓴 내용은 과거의 회상으로 교차 편집되어 소설로 완성해 볼 생각입니다.
한두 달 쉬었다 뒷이야기를 쓸 생각입니다.
욕심이 있다면 나와 가족에 대한 조각글들을 모아 언젠가 내 가족사에 대한 장편소설로 탄생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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