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더라 2(6)
H와의 냉각기(?)를 보내면서 마음에 팽팽했던 긴장이 사라진 대신 극심한 공허가 밀려 들어왔다. 겨울방학과 한 학기를 공허에 빠져 지내면서 이 무의미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H와의 접점이 없는 평행선이 주는 팽팽한 긴장을 내심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긴장이 사라진 공간과 시간이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학교를 떠난 후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 한 번 학교를 찾았다. 정리해야 할 일에는 H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대로 영영 떠나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저녁에 H가 잘 가는 도서관 1층 열람실에서 H를 찾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내 말에 H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의자에 주저앉아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얼굴을 본 그녀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굳이 헤집어 놓을 필요는 없었다. 아무 말없이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렇다고 마음의 정리 없이 있을 수는 없는 일, H를 내 마음에서 지우기로 하고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계속 썼다. 편지를 쓰면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H의 흔적을 저울질할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펜을 들고 편지를 쓰는데 H의 얼굴이 뚜렷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편지의 시작을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해서 “행복해라”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낼 수 있었다. 드디어 내 마음에서 H를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정리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서울에 왔을 때였다. 아무 마음도 없이 거리를 부나방처럼 걷다 찾아든 곳이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윤락가였다. 허무를 껴안고 들어갔다가 허무를 버리지 못하고 그 거리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H를 원했었다고,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뒤늦은 깨달음은 나를 깊은 자학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렇게 마음 없는 만행은 시작되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간혹 있다. 여자로 해서 힘들었으면서도 여자를 외면하지 못한다. 내가 남자라서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떼어내지 못하는 H에 대한 마음을 다른 인연으로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없는 만남이 진지할 리도, 오래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후배의 소개로 만나 단 한 번 데이트를 했을 뿐이었지만 그 한 번의 만남에서 덥석 키스를 해 버렸다. 그 여학생을 바래다주다 기숙사 앞 벤치에서의 일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성으로 느끼고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내 마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H를 마음에서 완전히 삭제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순간 마음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키스 한 번이 무슨 대수냐고 말할는지 모른다. 문제는 내 행동에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행과 다름없는 행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그 여학생이 나에게 너무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보내온 편지에 춘원 이광수의 시를 적었는데 “나 원하는 것이 없기에 내 모두를 드리리”라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편지는 더더욱 그 여학생을 만나서는 안될 이유가 되었다. 한 달쯤 시간이 지났을까, 친구라면서 전화가 왔다. 그 여학생이 어젯밤에 꿈을 꿨다고, 지금 같이 있는데 나올 수 있느냐고.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대답할밖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달리 없었다. 한동안 여성과의 만남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술집도 뻔질 나게 드나들었다. 한 번은 술집 접대부에게 이런 말도 들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세요?”라고. 글쎄, 뭘 가지고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 있어할 것도 없었고 자신을 잃을 것도 없었다. 어쩌면 H도 접대부가 나에게서 느꼈던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서도 정신적 자해는 계속되었다. 일주일 중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자해에 관련된 여자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은 크게 없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여학생에게만큼은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 기분에 여자의 순정을 마구 흔들어 버렸다. 한동안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감사하기는 마음을 버린 만행의 시간 속에서도 결코 내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학 동기의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사회과학 독서모임에서 지도하기도 했던, H의 친구였다. 따라서 실로 오랜만에 H와 조우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다고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데 먼저 후배가 H를 알아보고 귀속말을 했다.
“형, 쟤, H가 왔네.“
불과 이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H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 말라서. 신혼일 텐데 심하게 시집살이라도 하나 싶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촬영을 하는데 촬영을 안 하고 가려는 H를 신부가 불러 세워 사진을 찍었다. 나하고는 사진으로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럴 거면 애당초 내 시선이 닫지않는 곳에서 머물든지. 그토록 내가 미웠는지 나를 대하는 H의 굳은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솔직히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H의 모습을 대하니 비로소 H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추억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H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H의 결혼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짧은 만남에서 서로가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지나간 시간만큼 큰 거리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녀의 어긋난 사이는 반드시 한 번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H와도 그 만남이 있었기에 이제는 만행의 시간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