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더라 2(7)
언제나 떠올리게 되는 과거가 있고, 떠올리기가 힘들어 아예 기억에서 삭제한 듯 잊게 되는 과거가 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니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잊히는 과거도 있다. 그런 과거라면 굳이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떠올리게 되는, 그리고 떠올리고 싶은 과거는 좋은 추억이 된다. 반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추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심하게는 악몽 같아 추억은커녕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과거도 있다. 그렇다고 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온전히 분리해 버릴 수는 없다. 현재는 과거와 맞닿아 있어 과거가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잊었다고 믿고 있었던 일도 불현듯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와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H에 대한 내 마음도 그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H는 내 마음에서 잊혔고, 더군다나 나도 아내와 결혼을 해서 첫사랑의 기억을 되새김할 이유도 없었다. 오직 꿈속에 H가 두어 번 모습을 나타낸 적은 있었다. 사실, 그것도 생뚱맞은 일이었다. 평소에 H를 스쳐가듯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일이다 싶으면서도 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좀 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설마 하니 내 인생의 한 시점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사람을 무 자르듯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 게다. 그 마음이 강박이 되어 의식을 억누를 수 있었겠지만, 잠재의식까지 통제하지는 못해 꿈에서 의도하지 않은 만남을 가지게 되고.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H와의 뜻하지 않은 해후가 이루어졌었다. 우리 모두가 사십 대였으니까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토요일, 직장에서 도봉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등산로 초입에 있는 노포집에서 닭볶음탕을 먹고 있을 때 대학 동기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평소에 별 연락이 없었던 친구라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또 다른 친구와 여자 후배, 그리고 그 후배의 동기인 H가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단다. H의 이름이 반가웠다. 이십여 년 만에 듣는 H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 년이면 강산이 변해도 한참 변했을 시간이다. 동기의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H의 마른 모습과 쌀쌀맞은 태도가 오래 뇌리에 남아있었기에 남다른 걱정과 설렘이 내 마음에 공존하고 있었다. H는 마르지도 않았고, 미소를 띠면서 악수까지 청해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형이 철학적이라, 어려웠어요”라는 말을 거듭하고 있어 답답하면서 나에 대한 인식이 여전하구나 싶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H가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서둘러 자리를 떠,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다만,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말에 “부인에게 잘해 주세요”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도 똑같이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입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노파심일지도 모르지만 H가 급하게 자리를 떠나야 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날은 지나갔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약속이 잡혔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분당의 어느 역 앞 광장에서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H와 여자 후배가 약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보니 H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갈 거면 뭐 하러 와,라고 그때는 고작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H를 그렇게라도 보게 된다는 기쁜 마음과 함께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그것은 H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떠난 후 한 번 학교를 갔을 때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었다. 동아리 회원도 아닌 H의 친구가 술자리에 동석을 했다. 내 동기와 사귀는 사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언제 가세요?”
“내일.”
순간, 그 친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H를 만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왜? 나는 이미 마음에서 H를 지우기로 했었는데 또 다른 요식 절차가 필요할까 싶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시작한 것이 없으니 끝낼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이 편할 일이 아닌가. 내가 H를 만나야 할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러나 나는 불필요한 기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H가 나한테 두어 번 전화를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찾거나 할 용기까지는 없었는지 아무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H는 내가 자신을 붙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도 알 수 없는 불확실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은 상황에 H까지 끌고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생각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H의 손길을 외면한 순간 내 사랑은 비겁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사십 대가 될 때까지 H를 잊은 듯 살아오면서도 자격지심으로 내 비겁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H를 떳떳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H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따름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 끝났다 싶은 인연도 뜻하지 않는 만남으로 잠시 인연의 끈을 붙들듯 시간의 흐름을 따라 퇴색한 감정도 스펀지가 잔뜩 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마음에 스며있어 떨쳐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젊은 날의 사랑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마음에 스며 나의 비겁을 증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