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더라 2(8)
이제 쓰는 글의 내용은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내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이것이 첫사랑에 대한 내 마음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을 글로서 언급한 이상 내 마음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는 글로써 직접 첫사랑을 언급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기초로 장편소설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겠다. 소설이니만큼 허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 소설의 골격은 내 첫사랑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글들은 소설을 위한 기억을 더듬기 위한 자료였다. 비록 소설을 쓰기까지 첫사랑을 글로 언급할 일은 없어도 소설을 위해서라도 내 마음은 첫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음에 아픔이 크면 클수록 글도 깊어지리라 믿으며 아픔을 감내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탈고할 때 아래의 글은 그 소설을 가능케 한 첫사랑에 대한 헌사가 될 것이다.
먼저, H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한다. 암울했던 1980년대 초에 그래도 H로 해서 희망을 보았고 행복했다. 비록 행복했던 시간은 짧았고 번민과 아픔이 오래 내 마음을 가득 채웠지만, 돌이켜보면 그 아픔마저도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 전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병들어 넋을 나갈 지경이 되어도 그 또한 행복한 일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이해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H로 해서 이를 경험했다. 당시에는 그것도 행복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뒤늦게 온전히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는다.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H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의도는 없었지만 그녀를 힘들게 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내가 무지해서 마음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까닭이지만 결국은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변명까지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속절없이 H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또한 내 잘못을 너무 늦게 깨달아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 마음이 무지 아프다. 내 비겁이 마음에 걸려 오래 젊은 날의 사랑을 마음에서 지우고 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 마음이 저미도록 아픈 것은 H가 처음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을 때, 그러니까 “형, 축제에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마음에 가득했을 기대와 설렘, 그 보석처럼 빛나고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무지 아프다.
내 가치관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 역사주의이다. 나는 역사주의의 시각으로 내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개인사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H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내 면모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날더러 철학적이라고 한 H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H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그렇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진리에 대한 갈증과 감수성이 풍부했던 시절에 깨우친 지식을 앎에 머무르지 않고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학 재학 중 이미 역사의 법칙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고, 나와 함께 시대에 대한 고민을 공유했던 동료들의 몰개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본 회퍼가 역사주의에서 전체주의를 보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나를 두고 칸트주의자라고 비판한 여학생도 있었지만.
이후의 우리 역사의 흐름을 생각할 때, 그 역사의 흐름에 작은 동력조차 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민주화라는 역사의 변화는 후배들에 이르러 이루어진 일. 물론 그 변화가 시간 속에서 동력을 축적하면서 때에 이르러 일어난 것이라면 1980년대 초에 나와 동료들이 했던 고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 시대가 우리에게 암중모색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나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같은 길을 모색했던 모두의 자괴심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이유와 상황이 어떻든 모색의 방향을 달리했던 나의 경우, 역사 지향의 결과에 비추어 시대에 대한 나의 비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이십 대는 사랑에 대하여 비겁했고, 시대에 대하여 비겁했던 시절로 귀착될 수밖에.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내 삶에 있어 1980년대라는 시대가 가지는 의미를 최근까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내 삶에 있어서 한 시기의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크게 보면 내 삶의 전부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게 했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에 균열을 드러내는 단절, 여전히 역사주의적 사고가 내면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다른 글에서 밝힌 이유로 최근에 이르러 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첫사랑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내 잘못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글, 특히 문학은 자기 삶의 고백이면서 타자에게는 내 삶의 변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역사주의적 사고의 단면이겠지만, 첫사랑의 경험으로 소설을 쓸 때 내 삶에 있어 아프고 아름다웠던 한 시대를 비로소 정리하는 심정으로 쓰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심정은 지나간 한 시대를 긍정하고픈 발악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H에게는 간절한 변명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내가 미안하고 아팠다고. 그리고 고마웠다는 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