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11)
매년 봄이 오는 이맘때면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맞이한다. 사순절이란 기독교의 절기로 그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로부터 일요일을 제외한 부활절 40일 전(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정교회는 다르게 적용)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금식 등의 방법으로 이에 동참한다. 물론 기독교 최고의 절기는 부활절이다. 기독교가 글로벌한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중세시대 유럽인들의 생활과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독교가 가진 부활 신앙이 큰 이유가 되었다. 현실의 어떤 어려움도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신앙의 핵심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가장 비종교적인 사건이다. 십자가 형벌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형 방법으로 로마제국에서 행해지던 형벌이었다. 제국의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형벌로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모욕으로 최악의 불명예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예수 또한 온갖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며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푯말을 달아 예수를 마음껏 조롱했던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는 천하고 추한 것, 구제받지 못할 죄악과 실패의 징표로 여겨졌었다. 기독교를 제외한 어떤 종교도 경배의 대상을 이처럼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경우가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의 수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이 이른다는 교의를 안다. 그래서 예수가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그리스도임을 자기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신자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은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남이야 이를 이해하든 말든 기독교인에게는 십자가 서사는 가장 뜨거운 드라마로 다가온다. 실패의 징표인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예수는 오히려 승리하고 부활한다는 아이러니한 서사는 종교적인 믿음에 영감을 더해 왔다.
예수의 십자가 서사는 음악에 있어서도 영감을 제공해 왔지만 특히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수난곡(passion)이라는 장르로 정착한다. 음악사를 지루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예수의 십자가 서사가 영감이 가득한 음악으로 다시 탄생했는지를 기억할 필요는 있다. 특히 바흐의 (온전한 형태로 알려진) 마태와 요한 등 두 곡의 수난곡은 가히 종교음악의 금자탑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 바흐는 사복음서 모두를 텍스트로 수난곡을 작곡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마가 수난곡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음악의 스케일이나 질로 볼 때 가장 뛰어난 것은 마태 수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서사를 복음사가를 매개로 예수와 회한에 찬 인간을 대비시켜 장엄하고도 비탄에 찬 드라마로 표현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십자가의 서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음악이라는 옷을 입은 마태 수난곡이 연출하는 드라마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위대한 음악이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이 음악이 지닌 영감은 다른 예술에도 영감의 장치로 작용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마태복음’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에는 OST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선율이 흐른다.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마태복음’은 예수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무신론자로 알려진 파솔리니 감독이 만든 영화에 대한 평가로서는 의외이기는 하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할리우드식 감성에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사상적 혁명가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예수의 또 다른 면을 사유할 수가 있다. 뛰어난 영상미학자, 영상예술의 시인이라고 부를 만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선율은 영상과 보다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화에 대한 공감을 더하고 있다. 인접 예술 간에 영감을 교류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흔히 바흐의 수난곡을 일컬어 ‘음악으로 쓴 성서’라고 한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상투적인 표현으로 들린다. 마치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피아노의 구약성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피아노의 신약성서’라고 부르는 억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음악이 가장 추상적인 예술로서 다양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는 있겠지만, 성서가 가진 깊이에 버금가지는 못한다. 다만 추상적이기에, 비교적 형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이기에 음악이 주는 감동이 적지 않다. 음악으로 듣는 십자가 서사가 주는 감동이 여기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 서사가 음악과 만나는 접점에서 그 감동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난곡은 예배음악이 아니다. 미사나 칸타타와 같이 교회에서 연주되는 교회음악은 아니다. 수난곡은 오라토리오의 일종으로서 예수의 수난을 내용으로 하는 극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을 기억하면서 바흐의 수난곡을 들으며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사순절을 지키며 사는 방법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