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를 보낸 한옥에는 일반 가정집에서는 드문 응접실이 있었다.
내 기억에는 자수로 무늬 짜임을 한 빛바랜 모직 소파(지금의 안목으로는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가 격자무늬 창 쪽으로 바투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창을 투과한 햇살은 소파 테이블에 격자무늬를 수놓곤 했다.
소파에 올라가 햇살을 즐기면서 바라보는 격자무늬 그림자는 많은 상상을 불러오기도 했다.
테이블에 무늬가 진 격자에는 때때로 산들바람이 스쳐갔다.
그때마다 파르르 하고 문풍지 떨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렸다.
소파가 아니라도 상상의 나래는 집안 곳곳에서 펼칠 수 있었다.
방 안의 벽면과 천장에 바른 벽지의 무늬는 때로는 마주 보고 선 남녀의 모습으로, 때로는 사람이 아닌 것들(아직 글을 모를 때이니 만큼 그것을 구체적인 명사로 기억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막연히 재미가 있거나 두려움을 야기하는 존재들이었을 것이다)이 되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한옥 기둥의 옹이도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렸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이다.
단어를 익힐 나이가 되면 상상력은 보다 구체적인 것이 되어 갔다.
그때는 집 안에 갇혀 지낼 때가 아니라서 상상력을 제공할 소재도 늘어갔을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은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상상력을 자극했다.
누구나 경험했을 어린 날의 소중한 추억이다.
드디어 책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면 책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지만 강소천 동화집이나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책)과 같은 소설과 만화책의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그 지점에서 새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성적인 성향은 유년기에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하기에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가꾼 상상의 영토를 돌보지 않아 점점 황무지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옥의 응접실은 아버지에게는 불필요한 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의 집문화가 손님을 빈번하게 맞이할 일이 없다.
손님을 맞이할 일이 빈번한 사업가나 정치인이라면 또 모른다.
아버지는 평범하고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연 아버지의 응접실은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작은 형과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시절에 자신의 놀이 공간을 가졌던 아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사실을 생각하면 누구나 풍족하지 못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부모님께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던 데다가 오 남매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시기가 길었지만 자식들이 느끼기에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키워 주신 사실에 늘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응접실과 관련,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 기억이 하나 있다.
장난감을 별로 구경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큰누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나무로 만든 원통 모양의 실패로 만든 자동차(이 장난감을 무어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있었다.
그리고 색색의 고무 찰흙으로 갖가지 동물의 형상을 빚어 주셨는데, 실물은커녕 사진으로라도 한 번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동물의 모습에 홀려 소파 테이블에 나란히 진열한 채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놀라움이 얼마나 컸으면 긴 세월 동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을까.
이들 장난감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아버지의 응접실도 망각을 이기고 살아남아 추억을 채우는 한자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