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를 보낸 한옥이 담장과 대문으로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지만 기와와 조화를 이룬 푸른 하늘 이외의 바깥 풍경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 안 군데군데에 마치 블랙홀과 같은 틈이 있어 그 사이로 보는 바깥 풍경은 SF 영화나 소설에서 좋은 소재가 되는,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하는 타임 리프와 같은 경이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특히 뒤뜰의 담벼락에는 곳곳에 균열이 있어 심한 경우 벽체가 일부 떨어져 둥글게 작은 구멍을 만든 곳도 있었다.
한껏 까치발을 하고 작은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마냥 밝고 푸르렀다.
자그마한 구멍으로 밀고 들어오는 햇살은 환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담장 너머로 텃밭이 아니면 잡초가 우거진 빈터가 있었는지 바라보는 시야가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했었다.
인근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멀게 들렸고.
어느 날에는 담장에 밀착한 눈에 예쁜 새 한 마리가 다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었다.
훗날 그 새가 종다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옥이 유달리 어두웠다는 기억은 없다.
천정이 낮고 대청마루를 거쳐 방으로 가는 구조적 특징으로 가옥 내부는 어두울 수가 있다.
그러나 보다 개방적인 남쪽지방의 가옥구조로 보아 햇살을 덜 받는다고 볼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뜰 담벼락의 햇살이 유독 환하고 부드럽게 기억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담벼락이라는 장애물을 비집고 어렵사리 틈입하는 햇살이 훨씬 인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구멍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줄기나 그 구멍에 몰입하는 내 시선이 모두 한 지점에 집중하는 까닭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고 다른 무엇에 몰입할 때 우리는 그 몰입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 모두가 남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누군가와 함께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기 자신이,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숨 쉬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세상까지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의미가 아름다움이며, 사랑의 가장 위대한 가치는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지 싶다.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주는 아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빛이 바래지는 그 사랑의 풍경, 즉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이 형해화된다는 사실에 있다.
마찬가지로, 흐릿하고 단편적인 유년기의 기억을 애써 떠올리는 마음에는 애상과 안타까움이 배경이 된다.
내 삶의 소중한 한 시기가 대부분 기억의 저편으로 산란해서 잊히고 단편적인 기억을 붙들고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지 아프다.
그래서 망각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소소한 일상이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나오는 순간의 눈부신 광명과 같이 어릴 때 담벼락의 허물어진 구멍으로 틈입하는 햇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된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구멍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햇살과 푸른 세상, 그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기억 속에서 항상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