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과 꿈 Oct 01. 2024

소리로 만나는 바깥세상

 그다지 높지 않은 담장일지라도 꼬맹이에게는 성벽과 같은 높이와 압박으로 다가온다.

담장은 일종의 고함으로 세상을 안과 바깥으로 구분한다.

유년기의 나에게는 한옥이라고 특정해서 구분한 안이 직접 만나게 되는 유일한 세상이었다.

담장으로 둘러 쌓인 한옥이라는 공간이 내 생활 반경의 전부였기에 한옥을 벗어난 바깥은 당시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라는 존재가 완고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속성에 따르면 한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내 유년기는 지극히 메마르고 재미없는 시간의 집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빈약한 기억 속에서도 내 유년기가 메마른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되는 유년기의 풍경은 대청마루에 살포시 내려앉는 봄햇살처럼 부드럽고 앞마당에서 우람한 감나무의 이파리를 가볍게 흔들고 스쳐가는 산들바람처럼 유쾌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공간이 한정되어 보이는 것이 적은 만큼 반비례해서 상상력의 영역은 넓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으로 기득 채워지는 공간은 그만큼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한옥의 협소한 뒤뜰에서는 한낮이면 담장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담장에 가려 볼 수는 없었지만 인근의 (훗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나보다는 한참 나이가 많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참 동안 담벼락에 붙어 서서 있다 보면 그리움 같은 감정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곤 했다.

들려오는 소리의 대상이 나와 같은 사람, 그것도 같은 아이라는 범주에 속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감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리움은 그 대상과의 거리감이 전제가 될 때 가능한 감정이다.

그리움을 일으키는 대상과의 거리감이 길게는 생과 사로 나누어질 만큼 아득할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담장을 사이로 한 짧은 거리에서도 느낄 수가 있다.

특히 실체가 없는 소리로 만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그리움에다 애상과 같은 애처로움이 깃들어 있다.

멀리 들리는 기차의 기적은 물론, 부둣가의 갈매기 울음소리와 한밤중 고향 뒷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까지 듣기에 애틋한 심사가 드는 것이다.


 오직 들려오는 소리는 어떤 매개가 필요 없이 마음에 서로 다른 표상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내가 듣는 소리에서 그립고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면 그것은 추상성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대하여 내가 가지는 표상이 그렇다는 의미가 된다.

 '페이트의 산문'으로 잘 알려진 월터 페이트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그리워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구체적인 형식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 장르가 음악이라는 뜻이다.

형식은 자유로운 예술의 속성상 가급적 벗어나고 싶은 제약이다.

물론 형식이라는 틀이 없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술에 있어 형식은 벗어던지고 싶은 제약이지만 창작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이의 긴장이 있어 예술은 존재한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음악은 창작의 결과(재현이라는 매개가 존재하지만)가 추상적일 따름이다.

음악이란 창작(작곡)과 재현(연주), 그리고 수용(청중)이라는 세 요소가 있어야 성립하는 예술이다.

최종적으로 감동이라는, 올바른 수용의 과정이 있어야만 예술로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때, 감동의 질이나 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듯이 나는 머물지 않고 공기에 섞여 바람처럼 흩어지는 소리에게서  그리움을 느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한옥에서 보냈던 유년기였다.





이전 04화 긴긴 겨울밤과 군것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