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가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생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을 어지간히 살아본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모든 비극의 출발이다.
"내가 그때 그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와 같은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그때 내가 이랬으면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재산을 잃지 않았을 텐데, 또는 출세길이 열렸을 텐데,라는 부질없는 후회가 우리의 삶을 누추하게 만든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더운 날 얼굴을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운 아쉬움에 불과하다면 무슨 문제가 될까 마는 때때로 후회가 깊어 평생 마음에서 덧나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지난 시간에 붙들리어 쉽게 풀려나지 못할 볼모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 라고 할 것이다.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난 시간이 마음을 스치며 새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가 아프지만 내색을 않고 살아간다.
아픈 가운데 인생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이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내 유년이 끝나기도 전에 정든 한옥을 떠나 멀지 않은 윗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는 왜 번듯한 집을 떠나 규모를 줄여 이사를 가야 하는 연유를 몰랐다.
또한 온 가족이 이사를 가는 모습도 기억이 없다.
당시 이사를 가게 된 집에서 한 가지 기억에 뚜렷한 것은 장독대에 바둑판 크기의 인공 웅덩이였다.
20~30cm 깊이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웅덩이를 시멘트로 메운 기억이 남아있다.
하고 많은 일들 중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웅덩이가 잊히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
다만 성인이 되어서는 우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이를 잘못 메워 불운을 불러왔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새로 이사 간 집에서는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사 간 집에서 자라면서 자신을 둘러싼 여건과 환경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유년기의 정든 한옥에서인들 가족에게 곡절이 없었을까.
내가 너무 어려서 그 사정을 느껴 깨닫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때 이사를 하게 된 이유도 청소년기에 이르러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께서 본업과는 별도로 사업에 투자를 했단다.
경영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사업상 채무를 크게 지고 잠적을 했고, 졸지에 그 채무를 아버지께서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여파로 유년기의 한옥을 팔고 집을 줄여 이사를 가야만 했고.
큰 집을 처분했다고 해서 채무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어서 이후로 오랫동안, 내가 대학을 들어가기 직전까지 빚을 갚아야만 했다.
그 와중에서도 빠듯한 공무원의 월급으로 오 남매를 대학에 보내셨으니 가장의 무게가 힘에 겨웠을 것이다.
큰 형과 큰 누나가 동시에 대학을 다녔을 때에는 더더욱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 큰 누나가 대학 사 년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게 되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기 직전 아버지의 간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채무를 모두 정리하고 정년퇴직, 좀 더 여유롭게 삶을 설계해야 할 즈음이었다.
그리고 삼 년 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도 작은 형이 짝을 찾아 약혼을 하고 그렇게 바라시던 사법시험을 합격하는 모습을 보셨으니 조금이라도 한이 덜했을 것이다.
자식들이 모두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기에 작은 형의 약혼을 서두르셨다.
아직 혼자인 내가 눈에 밟혔는지 아버지께서는 사전에 녹음으로 남긴 유언에서 막내인 내가 불쌍하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은 그 시원이 오래된 것이었다.
내 유년기에 아버지의 투자 실패는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었고, 한동안 동업자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 때문에 평소에도 좋아했던 술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다.
세상만사가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체험으로 알기에는 때때로 생각보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다.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어긋난 선택 하나가 발병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어쨌든 불필요한 과음이 아버지께서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하교를 위해서는 후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유년기를 보낸 한옥을 지나치게 되었다.
살던 집이니만큼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굳게 닫힌 대문 때문에 집안을 엿볼 기회가 없었다.
딱 한 번 비스듬히 열린 대문 사이로 앞마당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앞마당의 한가운데를 꾸미고 있던 연못은 온데간데없이 마당 전체에 흰 자갈을 깔았다.
하긴, 연못을 관리하는 데에 손이 많이 갔을 것이다.
꽤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연못 관리는 꽤 힘이 부치는 일이다.
그날 이후로 유년기를 보냈던 한옥의 내부를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할 일이 없어 한옥의 내부는커녕 대문조차 보지 못했다.
추억을 따라 일부러라도 찾아갈 법도 하겠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 더 이상 자신의 영토가 아닌 한옥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 지금도 그곳을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오래된 한옥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의문이기에 추억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는 아쉬운 심사를 붙들고 싶지도 않거니와 내 마음에는 유년기의 한옥이 정감 있는 옛 모습 그대로 오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비록 오래전에 정든 집을 떠났지만 마음으로는 여태 그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 내 유년은 여전히 다사롭고 포근한 유년의 뜨락에서 늘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