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요즘의 가옥 구조가 빗소리를 듣기에는 썩 좋은 구조가 못된다. 단열을 위해 성능이 향상된 창호 시스템이 우리를 자연의 소리로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집을 벗어나 거리에 나서도 도시의 소음이 자연음을 압도하고 지워버린다. 그나마 주방으로 난 창의 비가림 차양이 있어 이를 두드리며 요란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한밤 중에 집안에서 듣는 겨울비 소리가 마음에 스며든다. 잠시 식탁에 앉아 눅눅해지는 마음을 따뜻한 커피로 달래어 본다.
갓 결혼한 신혼 때였을 것이다. 서해안으로 태풍이 지나간다는 예보를 듣고서도 아내와 함께 전라남도 해안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완도에서 민박집의 작은 동력선을 타고 낚시를 하다가 물살이 점점 거세져 뱃머리를 돌릴 때까지도 다음 날 그토록 많은 비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제법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보길도행 여객선이 출항을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고 보길도를 목적으로 한 여행을 포기할 수 없어 배편을 수소문, 해남에서 가까스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고 보길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민박집에 틀어박혀 있던 중 목포공항에서의 여객기 추락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가 1993년 7월 26일로 강한 비바람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던 아시아나 항공의 여객기가 공항 인근의 야산과 충돌, 68명의 인명을 앗아 갔던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와 같은 일기에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올 마음을 품었으니 대담했던 것인지, 철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다음 날 태풍이 지나가면서 거세었던 빗줄기도 잦아들었기에 걸어서 고산 윤선도의 원림을 다녀왔다. 전날에 비해 비바람이 많이 잦아들었다고는 하지만 태풍의 뒤끝이라 가볍게 빗자락이 흩날리는 날씨가 숲을 찾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빗자락에 묻어와 닿는 싱그러운 풀내음과 나무 이파리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연에 가까이 머물 때의 편안함이겠지만 편리를 좇아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 지가 오래되어 소리로라도 자연을 느끼고 호흡하는 것이 드문 일이 되었다.
문득 1977년 끝 간 데 없는 우주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 보이저 인공위성이 생각난다. 본래 태양계 탐사가 주목적으로 한 위성체였지만 지금도 태양계를 벗어나 끝없는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까마득하게 먼 훗날 우주에서 지구의 흔적이 지워질지언정 보이저호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이저호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이를 만나게 될 외계의 지적 생명체에게 지구를 알릴 정보를 금속 디스크에 수록, 보이저호에 내장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 정보에는 바다의 파도 소리, 비 내리는 소리, 천둥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이를 확인 가능한 외계 생명체가 있어 지구의 소리를 처음 접했을 때 외계 생명체가 경험할 놀라움을 상상해 본다. 그것은 멀리에 있는 미지의 문명을 확인한 놀라움 이전에 소리로 전달되는 생명과 조우하는 환희의 순간이리라.
처연하게 내리는 겨울비의 하강에 귀 기울이면서 두서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도 잠깐, 이마저도 심드렁해지면서 점차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내 마음도 자연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비로소 안도하는 것이리라.
진공관 오디오의 불을 지피고 쇼팽의 전주곡을 듣는다. 폴리니의 섬세한 타건이 빗소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LP 재킷을 꾸민 젊은 폴리니의 모습이 쇼팽의 음악을 닮았다는 생각도 함께한다.
비 내리는 겨울밤, 진공관의 불빛을 바라보며 쇼팽을 듣는 내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