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개똥이 거기에 있는지 몰랐어요...
반년 간 아무도 알지 못한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 회사로 출근한 첫날
회사가 달라진 것뿐만 아니라 하는 일도 기존에 해왔던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예산관리라는 숫자를 가지고 종합하고 정리하고 분석했던 일과 다르게
이번 회사에서 하게 될 일은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의 연구용역 또는 컨설팅을 수행하는
컨설턴트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의 일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여러 과목의 다양한 팀 프로젝트를 과제로 수행한 적은 있었지만
직업으로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나둘씩 배워나가야 했다.
기존 회사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보고서를 보며 내용의 논리구조와 내용을 표현하는 PPT 양식,
프로젝트 기간별 수행해야 하는 업무와 보고내용, 고객사 담당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요청에 대해 대응하는 법, 각자 맡은 보고서 부분을 통합하는 방식 등등
학교에서 수행한 팀 프로젝트는 정말 기초 단계 수준이었고,
솔직히 똑똑한 조장이 있으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것을 업으로 진행하게 되니 단순히 보고서만 잘 쓰는 게 끝인 것이 아니라
보고서를 잘 쓰기 위해 수행되어야 하는 업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PM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프로젝트의 같이 투입되는 인력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역량이 아니라 전체 팀의 역량이 중요했다.
입사 처음부터 학습과 테스트의 연속된 날들을 보냈다.
책을 보고 책 내용을 PPT 몇 장 분량으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고
회사의 지난 프로젝트 보고서를 보며 전반적인 개요와 수행 방법, 결론, 문제점 등을 프레젠테이션 하고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의 보고서 일부를 기존의 양식을 참고해서 작성해 보는 등
빠른 시일 내에 실전에 투입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트레이닝을 받았다.
기존에 경력이 있어서 과장급으로 입사했지만
회사의 업무를 놓고 보면 몇 년 경력이 있는 사원, 대리급 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처음이라는 방패가 있었지만 언제까지 방패 뒤에 숨을 수는 없는 법.
입사하고 첫 달은 트레이닝으로 정신없이 보냈지만
그래도 직급 값은 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퇴근해서도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는 등
나름 열심히 노력했고 조금씩 그 노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나고 신규 프로젝트 입찰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입찰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제안서 작성에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많은 부분을 담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진 자체가 좋았다.
각자 작성할 부분이 나누어지고 주어진 기간은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얼마 안 되는 부분의 제안서로 이 회사에서 계속 같이 갈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그동안 회사의 제안서, 보고서를 수없이 보며 어떠한 내용에서 어떻게 PPT를 구성할지 연습을 했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서니 연습은 연습이었을 뿐,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틀간 머리를 쥐어짜며 담당 부분의 구조를 작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장 한 장 PPT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작성하고 지우고 작성하고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잘 때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지내다 보니 담당한 부분을 다 작성하고 팀장에게 제출하고 나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회사 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루정도 팀장이 각자 맡은 부분을 종합하여 하나의 형태로 제안서를 완성했고
다음날 대표님과 같이 제안서를 검토하고 수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반적인 제안서 구조의 흐름을 보고 각자 맡은 부분을 검토하면서 수정사항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다 내가 맡은 부분이 나오자 대표님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보시더니
드디어 네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시작했구나라는 말씀을 하시며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고 몇 가지 수정만 하라고 지시하실 때
여기서도 밥값을 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제출할 때도 이대로 내도 괜찮은가, 조금 더 다듬고 내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수없이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잘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이제는 컨설턴트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일주일 간 머리 쥐어뜯은 게 억울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작성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조금 더 잘해보라는 격려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종 제출한 제안서에 내가 맡은 부분이 내가 수정한 내용으로 반영된 것을 보면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참여한 제안서는 심사에서 떨어져 조금은 허무했지만
제안서 작성이라는 큰 시험을 통과해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에 투입될 수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고객사의 요청으로 파견을 나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나이와 직급이 있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팀장이라는 직함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지만
사실상 실무는 같이 파견을 나간 선임 컨설턴트가 수행을 하였다.
전년도에도 그 프로젝트를 수행했기 때문에 실무를 처리함에 있어 막힘없이 수행했고
나는 고객사 담당자 또는 윗선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업무 조율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고객사 내부 직원들과 외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선임 컨설턴트가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게 고객사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여 정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표님이 사무실로 복귀하여 새롭게 들어가게 될 연구용역의 제안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하셔서
고객사에 2주간 회사로 출근하는 것에 동의를 구하고
회사에서 내 역할을 잠시 담당하게 될 직원에게 인수인계를 하였다.
다음날부터 회사로 출근하여 대표님께 연구용역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제안요청서를 검토하며 기관의 요청사항을 반영하여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제출마감 하루 전에 제안서와 각종 행정 서류들을 기관에 방문하여 제출하고
다음날 다시 고객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제안발표는 대표님께서 직접 하신다고 하셨으니 아마 이번 연구용역을 수주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회사에서 연구용역을 수주하였니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중간보고를 마치고
복귀하여 연구용역을 진행하라는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그저 회사에서 수주한 하나의 연구용역이었을 뿐인데
그 연구용역이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의 첫 단추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 나는 무슨 결정을 내렸을까...
10년 후의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른 채
회사의 연락을 받고 며칠 후 중간보고를 무사히 마친 뒤
다시 회사로 출근해서 내 자리에 앉아 하나씩 연구용역을 진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