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맞은 내 인생, 개똥처럼 흔적은 남네

나도 개똥이 거기에 있는지 몰랐어요...

by 잉여인간

1.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13)


연구용역 수주를 위해 제안서를 작성했다고 하지만

제안서만 작성하고 다시 고객사로 파견 가서 기존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수주 후에 어떻게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같이 연구용역에 참여하는 동료 직원에게 진행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발주 기관에서 진행하는 여러 사업 중 단위가 큰 사업에 대한 개선 방안 연구였는데

수주 후 계약을 진행하는 중이며 사업 담당부서에 착수보고를 하고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고 전달받았다.

아직 연구용역 업무 분장이 되지 않았기에 일단 회의실로 참여하는 직원들을 모아

단위 과업별로 중간보고와 최종보고에 반영될 내용을 정하고

세부 과업별로 각자 분담할 범위를 정해 본격적으로 개선 연구를 시작하였다.

담당부서로부터 요청한 자료를 전달받고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보면서

제안서를 작성했을 때 보다 보다 복잡한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사업이 해가 지날수록 규모가 커지게 되었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운영체계의 변화가 쫓아가지를 못해

연구용역을 시작한 당시에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기관에서는 발생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현실적으로 풀어보고 싶어 했다.

여러 자료들을 보며 우선 사업의 체계와 운영 과정의 흐름을 구조화하여

어느 부분에서 해결이 필요한지 분석한 후 사업에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하고자

몇 주간 출장을 다니며 사업 운영 현장을 참관하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 관계자들의 지역, 연령, 연차 등 성격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커다란 결론은 당장 작은 해결방안이라도 사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의 입맛에 맞는 해결방안이 나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장에서 사업에 참여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워야 했기에

이쪽 분야의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안된 나로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료 분석과 의견 수렴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개선방안이 주로 인사 노무 분야와 관련된 사항이라 집에 고이 모셔둔 전공서적을 다시 펼쳐보며

어떠한 이론적인 틀을 적용할 수 있을지 학교 다닐 때 보다 전공책을 더 자주, 더 깊게 보았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했다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겠다고 직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머릿속은 개선방안의 구조와 현실적인 적용 방법을 생각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중간중간 사업 담당자를 만나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묻고

연구 추진을 위해 협조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전달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내가 부족해서 인지, 아니면 뭐가 마음에 안 들었지는 몰라도

나에 대한 담당자의 모습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커져갈 때쯤 중간보고를 진행했다.

그동안 자료 조사와 의견 수렴한 내용을 정리해서

개선방안에 대한 시사점은 무엇인지

시사점을 기반으로 개선방안을 어떻게 수립하고

어떠한 이론적인 틀을 적용해서 세부 사항을 정리해 나갈지 보고를 하고

보고 내용과 앞으로 업무 진행에 대한 질의응답 후 중간보고를 마칠 때쯤

담당부서장과 담당자가 중간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고했다고 최종보고 때 중간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말을 전해왔다.

예의상 하는 말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중간보고 내용을 바꾸지 않고 여기서 심화시키면 되겠다는 생각에

약간은 안도감이 들긴 했다.

중간보고가 끝나고 두 달여 동안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하느라 정신없이 보냈었다.

하나씩 완성되어 가는 보고서를 보면서 그래도 뭔가 결론은 나기는 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사업에 적용이 될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계약 기간에 맞춰 최종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단계를 거쳐 구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작성하고 검토 후에 수정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했고

중간보고 때 보다 훨씬 빠르게 시간이 지나 12월 중순 최종보고의 날짜가 다가왔다.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는 시간은 지금도 부담이 되는데 그 당시에는 큰 스트레스였다.

반년 간 진행한 연구였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사업이어서 그런지

최종결과물에 대한 기관 담당부서의 기대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고

중간보고를 무사히 마쳤다고 해도 최종보고에서 어긋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그래도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걱정한 것보다 무사히 끝날 수 있었고

보고 후에 담당자의 모습도 그전보다는 조금 더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종보고 때 나온 일부 수정사항을 반영해서 보고서를 다듬고

담당부서의 검수 후에 보고서를 인쇄하여 제출하니 연말이 지나 연초가 되었다.

일 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이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와 연구용역에 참여하며

깨지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머리도 쥐어뜯어보았지만 그래도 한 뼘 성장했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회사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회사의 운영 주기를 보면 연초에 시간적 여유가 많이 있었다.

보고서 최종 제출 후 그동안 참여한 프로젝트들의 보고서를 하나씩 보면서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를 생각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리하고

간간이 나오는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나 연구용역을 진행하며 정리한 내용을 업무에 적용시켜보기도 했다.

그렇게 연초를 보내고 봄이 조금씩 절정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

옆팀 팀장이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며 잠깐 시간을 달라고 해서 대화를 나눴는데 놀라운 얘기를 전했다.

'투자를 받아 팀원들과 회사를 차리려 한다.'

'작년에 끝낸 연구용역에 이어서 올해도 기관에서 심도 있는 발전방안을 수립하는 연구를 발주할 예정이며,

그 외에도 그동안 업무적으로 연결된 회사와 기관들에서 여러 일들이 발주될 예정인데

새로 회사를 차리면 그 일들을 수주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얘기가 진행되었다.'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 물론 처우는 지금보다 올려주겠다.'는 말을 전하며 꼭 답을 해달라 했다.

일단은 생각해 보겠다고 말을 했지만 정말 팀장의 말처럼 될지는 반신반의했다.

계획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게 인생인데 무턱대고 같이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반년 넘게 방황한 시간도 보낸 적이 있어서

만약 계획대로 잘 안되면 또 그런 시간을 가지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답변을 미루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월급이 제 날짜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대표님이 불러 방으로 가보니 현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며칠 늦을 것 같다고 조금 기다려 달라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셨는데

연초에 비수기인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작년에 여러 일들이 진행되어 매출이 어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은 복잡하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 후 월급은 들어왔지만, 옆팀 팀장을 필두로 몇몇 인원들이 퇴사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이 분야에 발 담은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고,

작년 연구용역에서 성과를 냈다고 해도 아직은 더 배워나가야 하는데

합류하게 되면 오롯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수해야 하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기존 인력들이 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여기서 일을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어느 정도 마음의 무게가 기울기 시작했고

게다가 정말 말한 대로 몇몇 일을 수주했고, 작년에 이어서 발주된 연구도 수주했으니

합류해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일 년 하고 네 달이 지난 어느 날

당시 맡고 있는 연구용역의 중간보고를 끝내고 대표님께 다른 곳으로 이직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대표님은 알았다고 하시며 후임으로 새로 들어올 직원에게 인수인계 해줄 것을 요청하셨고

후임 직원에게 연구용역에 대해 설명하며 인수인계를 마무리했다.

회사 출근 마지막날에는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직원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뒤

퇴근 시간이 되어 정리한 물건들을 가지고 회사 문을 나섰다.

이렇게 나는 보다 이른 시간에 직장 생활이라는 연극에서 세 번째 막을 끝내는 커튼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