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하면 정말 많은 것이 생각난다. 너무 많아 이걸 다 설명하기엔 평생이 걸릴 것 같다. 보통 이런 큰 주제에 대해 생각하거나 글을 쓸 땐 처음부터 접고 들어가게 된다. ‘어차피 모든 사랑을 다 묘사하기 어려우니 작은 부분을 떼어 깊게 파고들자’는 생각은 비단 사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정, 불안, 행복, 우울 등 작은 뇌가 담아낼 수 없는 개념들이 모두 그렇다.
사랑은 전염이 된다. 살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겠지.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면 묘사를 다르게 해야겠다. 아직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사랑을 묘사하거나 설명한다면 매우 크게 혹은 매우 작게 얘기할 것 같다. ‘사랑은 너무 커서 이해하기 어렵고 큰 힘이 있다’ 거나 ‘사랑이 별거냐? 너와 내가 이렇게 나란히 기대 시간을 녹이는 게 사랑이다’ 일 것이다. 누가 맞다거나 더 가깝다는 얘기는 의미가 작다. 사람이 다르니 각자의 사랑도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겐 크기보다 전염성이 느껴진다. 즉, 크고 작음이 다 맞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정말 거대하다. 평소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은 설명해 준다. 그게 사랑이라면 더 얘기할 것이 없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하며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정말 작은 부분에서도 그것이 쓰인다. 매일 같이 퇴근하고 안아주는 것은 사소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 사랑이라 생각한다. 결국 비교적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이어져있음이다.
따지면 대부분의 행동을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동시에 대부분의 행동 안에 사랑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순서는 모르겠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일 안는다’일까? ‘매일 너를 안고 싶은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일까? 사실 순서가 어떻든 시작이 어떻든 사랑은 전염이 되어버린다. 결국 모든 게 사랑이 되어버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되어버린다. 의미가 포괄적이고 사람마다 다르고 내뱉는 순간 발산되는 힘이 강해서 정말 그렇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때로 오해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에 약하다. 역사에 강하려면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충주와 청주 사이에 일어난 일이 충청북도에선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알아야 한다. 나는 그런 걸 잘 모르겠더라. 각각의 일은 이해가 가나 연결성을 모르겠고 연결 지어 설명해 주면 또 다른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작게 보인다. 작은 곳에서 해석하고 찾는다. 단순한 걸 좋아하고 당장 눈앞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보다. 앞의 예시 중 ‘사랑이 별거냐?’측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모든 사랑을 관통하는 설명을 할 수 없어 이렇게 되어버린 것도 있지만 실제로 사랑이 그렇다. 별 것이면서 별게 아니다. 계속 팽창한다는 우주처럼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종착점은 항상 회의적이다. 사랑을 알고 규정한다고 그 사람이 사랑에 성공하느냐? 에리히 프롬도 결혼을 세 번했다(그냥 예시다). 결국 이렇다 저렇다 하기보단 그냥 내 사랑을 일구어 나가는 게 남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규정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 있다. 그저 사랑은 관측되는 게 전부인 것이다. ‘야 저거 사랑이다’라고 하는 것. ‘이건 사랑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최선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최고가 된다. 이렇듯 너무 다르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중구난방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사랑의 전염성이 강하다 보니 다 옮겨버린 결과이다. 여기저기 다 묻어버린 사랑 탓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동시에 쉽다. 나는 사랑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사랑인지 말할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사랑이 가장 큰 모순이 되기도 함에 이것 또한 그를 잘 설명하는 부분이다. 앞으로도 작은 사랑, 서민적 사랑, 소박한 사랑을 발견하며 살 것 같다. 큰 건 복잡하고 어려우니 당장 내 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지지고 볶는 게 전부일 것 같다. 사랑은 어쩜 이름도 사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