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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의 자격1

학교 담장 위를 걷는 사람

     

 2020년 9월 ‘내부형 공모’를 통해 교사에서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교사에서 교장으로 간 사례는 전국적으로는 사례가 꽤 있는 편이지만 세종시는 첫 번째 사례였고 아직까지는 유일한 사례이다. 

 순탄하진 않았다. 처음 발령 당시 모 신문사에서 공모 교장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였고, 그 신문 내용을 지역신문 곳곳에서 인용 보도하였다. 기사가 지역 온라인 카페에 링크되면서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고 지인들이 이런저런 통로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실관계를 잘 알지 못하고 미루어 짐작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나를 아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응원하는 글도 있었다. 분명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 길을 알지 못했다. 또 한편으로 실명으로 공개된 기사에 해명을 한다고 해서 해명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부담은 새로운 마을이 조성되고 새로운 학교가 문을 열어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그 학교 교장이 이런저런 구설에 오른다는 것, 그 자체가 마음을 더 어지럽게 했다. 법적 조치를 취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학교는 지역공동체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건데 내 문제를 해결하자고 또 다른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과 법적으로 가도 과정상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 그것도 부담이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발령 초기 속상한 마음이 있었지만, 학교에서 적응하며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혼자 속앓이를 하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깊을수록 잘못된 판단,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 판단은 ‘그 단체 혹은 그 신문기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공동체가 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일들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다만 학교가 조금 안정화되면 한 번쯤은 ’교장의 자격‘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차곡차곡 쌓아서 어느 정도의 점수가 되었고, 그 점수로 자격증을 얻었으니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노력을 폄훼하거나 더 값지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 길을 가지 않아서 그 길을 모른다. 아직 소수 몇 째자리까지 있다는 그 점수 체계도 잘 알지 못한다.     


 제 방식으로 자격 혹은 역할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교장은 학교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다. 담장 위에서 학교 안팎을 살피며 끊임없이 걸으며 그 담장을 조금씩 낮춰야 한다.     

 “담을 최대한 높게 해주세요.”

 지인이 인근 지역에 주말에 머물 집을 짓는데, 건축 설계사에게 주중에 사람이 없으니 안전한 집을 지어야 한다고 부탁했단다.

 “진짜 안전한 집을 지으려면 밖에서 볼 수 있도록 담을 낮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전에 대한 접근 방식이 경직되어 있다. 큰 다리가 무너지거나 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등으로 인해 ‘무엇보다 안전’을 말한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지 마’ 혹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체가 멈추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안전은 중요하지만 새로운 시도, 도전 자체를 가로막는 ‘명분’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다친 경우가 발생했을 때 ‘자전거는 위험하니 학교 올 때 타고 오지 마세요.’라고 자전거 등교 자체를 금지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 많은 학교가 그렇다. 아이들은 저녁이나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회에서도 친환경적이고 건강에도 좋다며 권장하고, 자전거 도로는 나날이 넓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다 사고가 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학교에서 자전거 안전교육 등 예방 교육을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고를 예방하진 않는다. 진단을 위한 잠깐 멈춤 후에 조치를 취하거나 예방교육을 실시한 후에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사고가 생겼을 때 학교로 오는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게 된다.     


 이때 교장의 말은 중요하다. 만약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전거 타고 오지 못하도록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이 말 한마디의 위력은 생각보다 크다. 누구도 아이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한 교장의 말을 어기지 못할 것이다.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금지’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같이 진단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방식, 공동체가 문제가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안전’을 방패 삼아 교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쉬운 길을 가면 안 된다.


 “학부모는 외부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학부모를 외부인으로 보기 시작하면 학부모도 외부인의 시각으로 학교를 대한다. 외부인에게 협력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학부모가 ‘요구’하는 수요자로서 학교를 대할 때 참 난감한 경우를 많이 겪는다.

 가정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사가 생각하는 연계와 가정에서 생각하는 연계가 다를 때가 많다. 이건 학교에서? 이건 가정에서? 각각의 역할로 혹은 문제의 원인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룸으로 인해 핑계가 되기도 한다. 


 똑같은 일이라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다면 서로 미루는 역할이 아니라 서로 챙기는 역할이 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다. 이러한 사례만이 아니라 실제 아이들에게 배움의 장을 넓힐 때 학부모, 특히 학부모회는 큰 역할을 한다. 지역사회와 연결해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학부모와 소통을 어려워하는 교사를 만난다. 특히 어떠한 갈등으로 만나는 학부모와의 만남은 조심스럽고 어렵다. 어떠한 일에 대한 사실관계보다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관계 또는 그로 인한 오해로 감정상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어떤 갈등으로 만난 사이는 이미 벽을 높게 세운 상태이기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학부모를 만날 때 어려워하지 말고 만나라고 한들 별로 의미가 없다. 정말 ‘안전함’을 보여야 한다. 


 달마다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온라인 가정통신문 형식으로 보내는데 초기에는 편지 마지막에 전화번호를 적어 보냈다. 당시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전화번호가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딴에는 소통의 창구를 크게 열어보자라는 호기도 있었고, 먼저 이렇게 여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열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전화번호를 공개함으로 인해 소통의 창구가 크게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방법도 어떤 사람에게 아주 작은 소통의 창구일 수 있고, 정보의 종류에 따라 소통 대상과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소통 창구 중이 하나일 뿐이다. 

 소통과 신뢰는 일상 속에서 조그만 일들이 모여 조금씩 쌓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하나의 큰 사건으로 ‘감동’을 받는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그동안 작은 사건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그 사건이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예를 들어 4년 동안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서 전면등교를 결정하고, 모두가 함께 하는 졸업식을 기획했던 일, 안타까운 서이초 사건에서 9.4.에 재량휴업일로 지정하는 사건은 그 사건하나로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 동안 해밀초라는 공동체가 신뢰를 쌓아올린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즉 하나의 큰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에 주목하는 것보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맥락을 살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펴야 한다.

 교장은 학교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장이 높고, 폭이 좁을 수 있다. 학교 안에서 부는 바람에 휘청, 학교 밖에서 부는 바람이 휘청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담장 위에서 학교 안팎을 살피며 끊임없이 걸으며 그 담장을 조금씩 낮춰지고, 폭은 넓어질 것이란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한 믿음으로 오늘도 학교 담장 위를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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